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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왜곡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입력
2021.01.29 16:00
수정
2021.01.29 18:1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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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어논 멤버를 포함한 의회 시위대. AFP 연합뉴스

큐어논 멤버를 포함한 의회 시위대. AFP 연합뉴스


세상에 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 대선 이후로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내가 굳이 소설을 쓰며 먹고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이했다. 의사당이 극우 세력에 기습을 받은 것만 해도 놀라웠는데, 뿔이 달린 털모자를 쓴 반나체의 남자가 성조기가 달린 창을 들고 상원 연단에 오른 사진은 초현실적이었다.

덕에 난 큐어논이라고 불리는 미국 극우 음모론 세력의 신념을 훑어보게 되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그냥 트럼프의 맹목적인 추종자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신념은 이제 우리가 사는 지구와는 한창 동떨어진 평행 우주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진심으로 트럼프가 승리했다고 믿었다. 부정선거 운운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에게는) 빛의 용사이자 구세주인 트럼프가 이겼는데 바이든을 꼭두각시로 써먹기 위하여 일부러 대통령에 앉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트럼프가 수세에 몰릴 때마다 트럼프가 미래를 위한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종말론자들과 크게 닮아 있었다. 약속한 시간에 종말이 오지 않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종말의 시기를 미루는 가짜 예언자들.

극우 사상과 반지성주의와 인지 부조화라는 인간 정신의 세 독주로 만들어진 가장 끔찍한 칵테일을 맛보고 나자 마음이 불편했다. 예전 같았다면 무식한 인간들이 무식한 소리를 믿는 무식한 광경이라고 비난하면서 넘어갔을 테지만, 이제는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들 대다수가 처음부터 몽상가의 악몽 같은 이야기를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불만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세상에 대한 인지를 자신의 믿음에 맞추어 가다가 종국엔 그토록 뒤틀린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겠지.

좀더 어렸을 때의 나는 지성을 갖춘다면 그 정도로 인지가 왜곡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사람의 지성이 어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게임의 캐릭터가 모험을 통해 경험치를 올리고 더 강해지는 것처럼, 나도 꾸준히 공부하며 밑천을 쌓아올리다 보면 그런 인지 왜곡에 면역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이를 차차 먹어가며,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충격적으로 이상한 신념에 경도되는 사례를 한두 번 목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큐어논은 극적인 사례일 뿐이었다.

이제 나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확신과 내가 틀렸을 때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자세, 지성 비슷한 것이라도 소유하려면 그 둘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도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현실을 내 신념에 끼워 맞추고 싶을 때가 많다. 결코 틀리고 싶지 않고 옳은 말만 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필연적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하수종말처리장 속에서 나도 큐어논과 별다를 바 없는 왜곡에 빠질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 주었더니, 친구가 롤랑 바르트의 말을 인용했다. 무지란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지식의 포화 상태로 말미암아 미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며, 지성이란 앎의 자기 쇄신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심너울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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