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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언어, 다시 찬드라의 경우

입력
2021.01.21 18:40
수정
2021.01.21 19:01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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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mbc every 1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영상 캡처

mbc every 1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영상 캡처


이거 전에 봤던 내용인가? 어쩌다 텔레비전을 켜면 처음 보는 방송인데도 이전에 봤던 것처럼 생각되는 프로그램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이 좌충우돌하는 방송. 그 프로그램 속의 외국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길들을 못 찾아 헤매고, 먹는 방법을 몰라 엉뚱한 방식으로 음식을 먹는다.

그들의 고난은 우리의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에는 죄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 외국인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 한국인들의 친절함에 감탄할 것이라는 것, 포만감과 만족감으로 식사를 끝내리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넘어지면서도 걸음마를 배우려는 아이를 보듯, 난생 처음 스스로 음식을 떠먹는 아이들을 보듯 대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여기 여러분을 흐뭇하게 만들 안전한 고난을 전시합니다. 마음껏 즐겨주세요.

그렇다면 찬드라 쿠마리 구룽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서울에서 길을 잃었고, 배고픔에 지쳐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을 먹었고, 자기 수중에 현금도 지갑도 없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관찰 예능이라면 점점 고조되는 이 위기 상황은 높은 시청률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게 진짜 관찰 예능이라면 아마 세상에게 가장 긴 관찰 예능이 될 것이다. 찬드라는 무려 6년4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찬드라가 주인공인 예능에서 우리는 네팔어로 외국인임을 주장하는 멀쩡한 여성이 6년 동안 끊임없이 외면당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손발이 묶인 채 강제로 정신 치료 약물을 먹는 모습도 봐야 할 것이다.


'여섯 개의 시선' 찬드라 쿠마리 구룽

'여섯 개의 시선' 찬드라 쿠마리 구룽


수많은 실수와 불운의 겹침으로 찬드라의 사례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찬드라의 경우는 한국 사회가 '낯선' 언어의 사용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다. 여기서 낯선 언어란 한국어와 영어라는 합법적 언어, 그리고 어느 정도 위세를 가지고 있는 몇몇 언어를 제외한 언어다. 여러분이 이 땅의 이주민이라면, 한국어를 못한다는 것은, 영어를 모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힘 있는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여러분이 재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찬드라의 문제는 그가 한국어를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한국어를 못하는 것을 일종의 질병으로 만드는 한국 사회였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은 질병이며, 동시에 추방과 분리의 근거가 된다. 한국인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이주민들을 정상적으로 언어를 발달시키지 못한 미성숙한 존재로 본다. 그리고 미성숙한 존재는 마땅히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그건 여러분들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자가 됐다는 뜻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정상적인 집에서 잠을 잘 권리가 없다. 잠은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에서 자라. 여러분은 화장실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땅을 파서 볼 일을 봐라. 여러분은 공적 마스크나 재난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알아서들 살아남아라.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재난 문자를 전송해 줄 수 없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다가 한밤중에 홍수가 밀려오면 열심히 수영하시기 바란다. 재난 문자를 읽을 수 없어서 자신이 전염병 감염자와 접촉한 사실을 알 수 없어도 걱정 마시라. 한국 속담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인에게 범죄 피해를 당하면 신고하시라. 다만 우리는 여러분의 언어를 모르고 여러분은 한국어를 모르니 피해자인 당신이 피의자가 되고, 피의자가 피해자로 둔갑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2019년 8월 '고용허가제 시행 15년 이주노동자대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9년 8월 '고용허가제 시행 15년 이주노동자대회'. 연합뉴스 자료사진


위험한 기계를 다루는 일을 해야 하는데 한국어 설명을 잘 모르겠다고? 원래 일은 좀 다치면서 배우는 거다. 일단 하면서 배워라. 기계에 손가락이 잘렸어요. 뭐라고? 그건 당신이 부주의해서 그런 거야.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계 사용법을 알려주셨어야죠. 뭐라는 거야. 한국어도 못하는 주제에. 한국에서는 하루 평균 7명 씩 일하다가 죽어 나간다고. 뭐 그 중에는 당신 같은 외국인도 있겠지. 우리가 모르는 말로 떠들지 마. 다 당신 잘못이고 우리는 할 만큼 했어. 이제 당신 나라로 돌아가기 바라. 우리는 손가락 없는 당신이 필요 없어. 우리는 이제 다른 손가락을 구할 거라고. 우리한테는 잘라도 잘라도 일하겠다고 줄을 선 손가락들이 많단 말이야.

이거 전에 봤던 내용인가? 찬드라의 사례는 1993년의 일이다. 그러나 찬드라의 재난은 세기가 지난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는 내국인 노동자보다 외국인 노동자가 더 많은 산업 재해를 당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코로나19라는 희대의 재난을 겪기 훨씬 전부터 한국 사회는 이주민들에게 언어 문제를 통한 재난을 선사하고 있었다.

찬드라에 대한 영화까지 만들어졌지만 한국 사회는 반성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새로운 찬드라들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존재들은 비존재이니까. 일본의 경우,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들이 지진에 대처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은 것을 보고 '쉬운 일본어'를 보급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독일에서도 독일어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독일어가 사회적 장벽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쉬운 독일어'를 제정하고 보급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물론 이런 운동은 최선의 해결책도 아니고 나름의 분명한 한계를 내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이들 사회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을 비존재로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불행 중 다행인지, 한국 사회가 이러한 무감각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판결이 나왔다. 러시아 출신 노동자가 합판 절단 기계로 작업하다 손가락 3개가 잘린 사고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안전교육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시사인 692호, 올해의 이주인권 디딤돌 판결 기사)

한국 영토 안에서는 오직 한국어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위의 판결은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에 왔으니 한국어를 하라는 말은 당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폭력이 되어 누군가의 목숨과 손가락을 앗아가고, 그들의 삶을 망가뜨린다. 강조하지만 어떤 재난은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만들어진다.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우편투표함. AP 뉴시스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우편투표함. AP 뉴시스


지난 해 미국 대선 관련 사진 보도 중 나의 시선을 잡아 끈 것들이 있었다. 사진에는 한국어로 된 투표소 안내 표지판과 중국어가 쓰여 있는 투표용지가 찍혀 있었다. 영어를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로만 된 투표용지를 바라보는 것을 상상해본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재난이다. 언어 때문에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사진들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영토, 하나의 국민이라는 환상을 깬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내게 한국 사회 내에서 한국어와 다른 여러 언어들의 공존을 꿈꾸게 한다.

이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인정하고, 그 언어를 한국 사회의 공적 의사소통 체계 안에서 유통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이주민들에게 강제한, 그 오래된 재난을 막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어렵겠다고?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이, 얼마나 더 많은 잘린 손가락이 필요한가?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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