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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연합군의 숨통을 틔운 여성 레지스탕스들

입력
2021.01.25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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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닌 더흐레이프는 2차대전 전시 유럽 연합군 공군 추락기 낙오병들을 구출해 본국으로 피신시킨 레지스탕스 그룹 '코밋 라인'의 최연소 요원으로서 만 4년간 3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스스로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해낸 요원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무명이었다. 맨 위 사진은 전후 미국 정부 공훈 메달을 받는 모습. 가족 사진, 위키피디아.

자닌 더흐레이프는 2차대전 전시 유럽 연합군 공군 추락기 낙오병들을 구출해 본국으로 피신시킨 레지스탕스 그룹 '코밋 라인'의 최연소 요원으로서 만 4년간 30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스스로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해낸 요원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무명이었다. 맨 위 사진은 전후 미국 정부 공훈 메달을 받는 모습. 가족 사진, 위키피디아.


1941년 10월 16일, 2차대전 나치 치하의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역. 16세 소녀 자닌 더흐레이프(Janine de Greef)가 성인 남자 둘과 함께 남서부 국경도시 앙글레(Anglet)행 기차에 올랐다. 자닌은 나치 수배자를 피신시켜 중립국을 거쳐 본국으로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한 비폭력 레지스탕스 그룹 '코밋 라인(Comet Line)' 요원이었고, 두 남자는 독일 점령지 벨기에에 추락한 영국 공군(RAF) 조종사였다. 나치 검문에 대응하고, 부역자들의 눈초리를 피해 그들을 안전지대까지 데려가는 게 자닌의 임무였다. 위조 신분증과 통행증은 있었지만, 무심코 뱉는 외국어 한 마디, '외제' 담배 한 개비 때문에 여러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위험하고 대담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종 평범해 보여야 한다는 것, (삼촌이나 오빠의) 보살핌을 받는 척하며 그들을 세심히 챙기고 보호해야 하는 거였다.

연기도 임기응변도 경험의 몫이 크지만, 그날은 자닌의 레지스탕스 데뷔 일이었다. 하루 전 일기에 그는 이렇게 썼다. "12시 24분 기차다. 컨디션은 최상이다. (잘 못 먹어서) 뼈가 앙상하고 배도 홀쭉하지만, 긴장해서 다리를 떨 일은 없을 것이다. 버벅대지 않고 완벽하게 해낼 테다."

앳되고 순진한 자닌의 외모는 썩 좋은 보호막이었다. 그는 임무에 성공했고, 앙글레의 안전가옥에서 함께 밤을 지샌 뒤 피레네 산맥 너머 2차대전 중립국 스페인까지 안내할 가이드에게 그들을 인도하는 일까지 완수했다. 그날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내가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2차대전 유럽 연합군 탈출을 도모한 레지스탕스 그룹 중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펼친 '코밋 라인'의 최연소 요원이자 '아마도' 마지막 생존자인 자닌 더흐레이프가 11월 7일 별세했다. 향년 95세.

파일럿 한 명이 전투기 10대보다 값졌다

1940년 5월,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전개됐다. 퇴각을 거듭하다 프랑스 북부 해안도시 됭케르크까지 쫓겨 전멸 위기에 몰린 영국 원정군을 비롯한 연합군 약 34만명의 구출작전. 민간 어선들까지 가담한 그 작전은 '기적적'으로 성공했지만, 그로써 영국을 뺀 유럽 대륙 전체가 사실상 나치 수중에 넘어갔다. 한시바삐 대소련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려던 히틀러는 곧장 영국 봉쇄를 선언했다. 수송선단을 겨냥한 격렬한 공중전은 도버해협과 템즈강 하구를 '지옥불 구덩이(hellfire corner)'로 만들었고, 그해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이른바 '영국 대공습'을 감행했다. 12월 미국이 참전하기까지 나치에 맞선 건 영국 뿐이었고, 주력이 공군이었다.

당시 영국 공군(RAF) 주력기 중 하나인 '호커 허리케인'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한 캐나다 여성 장애인 항공엔지니어 엘시 맥길(Elizabeth 'Elsie' MacGill, 1905~1980)을 소개하며 인용한 바 있는 처칠의 말- "허리케인이 없었다면 영국은 단 몇 주 만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은 과장도 엄살도 아니었다.

39년부터 시작된 영국(42년 이후 미국 동참)의 보복공습 즉 '독일 본토 항공전'과 주요 도시 전략 폭격도 런던대공습이 끝난 뒤부터 본격화했다. 전투기를 뺀 영-미 폭격기 출격 횟수만 약 14만 4,000여 회. 그들은 약 277만 톤의 폭탄을 독일 주요 도시에 퍼부었고, 독일 공군의 반격과 대공포에 전투-폭격기 약 4만 대(영국 2만2,000대)와 파일럿 및 기총수 약 15만 8,500명을 잃었다. 처칠의 말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누락했다. 비행기 못지않게 조종사가 절실했다. 파일럿은 보병과 또 달라 단시일에 양성할 수 없고, 출격 경험이 많은 파일럿 한 명은 전투기 열 대보다 값진 존재였다.

2차대전 유럽 연합군 낙오병 등 나치 수배자 주요 탈출 경로. 최대 조직인 코밋 라인(붉은색)을 비롯, 셸번(Shelburne) 라인(파란색)과 패트(Pat)라인이 운영됐다.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그래픽뉴스부 송정근 기자.

2차대전 유럽 연합군 낙오병 등 나치 수배자 주요 탈출 경로. 최대 조직인 코밋 라인(붉은색)을 비롯, 셸번(Shelburne) 라인(파란색)과 패트(Pat)라인이 운영됐다. 위키피디아 자료 참조, 그래픽뉴스부 송정근 기자.


'코밋 라인'은 41년 여름부터 종전 직전까지 800여 명의 영-미 파일럿과 첩보원 등 나치 수배 민간인을 구출한 전시 유럽 최대 민간조직이자, 그들이 활용한 '벨기에- 프랑스- 피레네- 스페인' 탈출 루트였다. 벨기에-프랑스인이 주축이었던 활동가(helper) 3,000여 명 대부분(65~70%)은 여성이었고, 리더도 벨기에인 24세 여성 앙드레 더용(Andree de Jongh, 1916~2007)이었다. 간호사 출신인 더용은 41년 8월 은밀히 동지를 규합해, 추락한 연합군 비행기 조종사를 구출해 숨겨주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롤모델은 1차대전 연합군 낙오병들을 구조해 당시 중립국 네덜란드로 피신시킨 영국 출신 간호사 이디스 카벨(Edith Cavell, 1865~1915)이었다고 한다. 인도주의자였던 카벨은 벨기에 종군 간호사로 일하며 피아 불문 부상병을 간호했고, 연합군 병사 약 200명을 탈출시킨 사실이 발각돼 독일군에 의해 총살 당했다.

더용의 짐은 카벨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가까운 네덜란드를 포함해 대륙 전역이 나치 수중에 있었다. 유일한 탈출 경로는 프랑스를 종단해서 국경과 피레네 산맥을 넘는 거였다. 극우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도 전쟁에만 불참했을 뿐 노골적인 친나치였고, 스페인 국경 경비대와 준군사경찰은 나치 못지않게 연합군 피신자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었다. 하지만 수도 마드리드에는 영-미 대사관이 있었고, 반도 최남단 지브롤터(Gibraltar)는 영국의 해외 영토였다.

41년 코밋 라인을 구축하고 43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운영을 총괄한 벨기에 간호사 출신 레지스탕스 앙드레 더용.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전후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가로 일했다. 사진은 전후 영국 왕실 훈장(George Medal)을 받은 직후의 더용. 위키피디아.

41년 코밋 라인을 구축하고 43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운영을 총괄한 벨기에 간호사 출신 레지스탕스 앙드레 더용.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전후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가로 일했다. 사진은 전후 영국 왕실 훈장(George Medal)을 받은 직후의 더용. 위키피디아.


더용의 난제, 즉 코밋 라인의 파리 이남 루트를 완성시킨 건 '더흐레이프 일가'였다. 더 엄밀히 말하면 자닌의 어머니이자 코밋 라인의 남부 책임자 엘비어(Elvire de Greef, 1897~1991)였다. 수도 브뤼셀의 유력 리버럴 일간지('L’Independance Belge') 기자였던 엘비어는 1940년 5월 벨기에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직원용 피난 버스로 가족과 함께 프랑스 남부 최남단 바스크 지방의 앙글레로 피신했다. 이미 국경이 막혀 영국으로 떠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하지만 일찌감치 레지스탕스 활동에 동참할 의지가 있던 엘비어는 브뤼셀의 한 지인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암호를 남겼다. 그 암호가 'Is Go dead?'였고, 'Go'는 더흐레이프 일가의 반려견 이름이었다. 더용의 요청에 응해 코밋 라인 남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그가 쓴 코드네임은 '탕 고(Tante Go, 고 아주머니)'였다.

밀수를 부업 삼은 여성 레지스탕스들

엘비어는 전시 국경 바스크 지방의 가장 '알찬' 일자리였다는 밀수-암거래 시장에 뛰어들어, 빼어난 수완과 전시 영국 정보국(MI9)이 코밋 라인에 지원한 자금으로 금세 자리를 잡았다. 밀수 루트는 피신자들의 월경(越境) 루트였고, 피레네 산맥과 골짜기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던 밀수꾼들은 노련한 가이드였다. 물론 그들은 넉넉한 보수를 받았다. 엘비어는 "패전국의 시민이 된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지역 주민들을 포섭, 파일럿들이 월경 전 머물 수 있는 안전 가옥 네트워크를 꾸려 운영하기도 했다.

전쟁 전 사업가로 일하며 여러 언어를 익힌 자닌의 아버지 페르난드(Fernand, 암호명 Oncle Dick)는 바스크 나치 주둔군 통역사 및 번역가로 취업해, 신분증과 통행증 용지를 훔치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림 솜씨가 빼어났던 자닌의 오빠 프레디(Frederick, 1923~1969)는 빈 용지에 사진을 붙이고 직인을 위조하는 임무를 도맡았고, 때로는 가이드로도 활동했다. 저 모든 일의 리더가 엘비어였다. 엘비어는 밀수-암시장에서 알게 된 나치 장교들로부터 정보도 훔치고, 그들의 비리 약점을 고삐처럼 쥐고 적잖은 도움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가 "부적절한 시간에 부적절한 장소에" 있다가 검문을 당해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나치에게 그는 밀수 동업자였다.

지금은 전시 유적지로 명패가 붙은 더흐레이프 일가의 앙글레 셋집 '빌라 뵈장(Villa Voisin)'은 바스크 나치 주둔군 사령관의 집에서 1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고, 더흐레이프 일가는 아무도 체포되거나 희생되지 않았다. 일가는 약 320여 명의 연합군 파일럿을 구출했고, 그들 다수는 다시 전투-폭격기를 몰고 전선에 나섰다.

일가의 막내 자닌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기까지 약 3년 간 기차와 전철, 자전거, 도보로 30여 차례 '코밋 라인'을 왕복했다. 앙글레 안가에서 스페인 국경까지 마지막 구간은 약 25km. 자닌은 적게는 두 명, 많게는 대여섯 명의 도망병들과 도보나 자전거로 가이드 접선장소까지 이동해야 했고, 병사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자전거들을 숨기거나 도로 가져오는 일이 무척 골치 아픈 일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자닌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당시 영국 공군 중사 밥 프로스트(Bob Frost)는 훗날, 파리-앙글레 기차 안에서 한 미군이 노파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무심결에 영어를 쓰는 바람에 위기에 처했다가 자닌의 능란한 기지로 모면한 일화를 소개하며 "당시 자닌은 눈꺼풀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고 "그는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했다.

더용은 42년 1월 동료의 밀고로 나치에 체포돼 고문 끝에 자신이 '코밋 라인'의 총책임자라고 실토했지만, '너무 젊은 여자여서' 게슈타포 장교가 그 자백을 못 믿은 덕에 포로수용소에서 무사히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그는 아프리카 콩고와 카메룬 등지의 나병 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사했다.


더흐레이프 일가는 '코밋 라인'의 핵심인 파리 이남 탈출루트를 구축한 주역이었고, 어머니 엘비어는 남부지역 책임자였다. 1944년 프랑스 바스크 앙글레 시절의 오빠 프레디, 어머니 엘비어와 자닌(사진 왼쪽부터). 가족사진, 가디언

더흐레이프 일가는 '코밋 라인'의 핵심인 파리 이남 탈출루트를 구축한 주역이었고, 어머니 엘비어는 남부지역 책임자였다. 1944년 프랑스 바스크 앙글레 시절의 오빠 프레디, 어머니 엘비어와 자닌(사진 왼쪽부터). 가족사진, 가디언


신변 노출 위험이 커지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코밋 라인 활동도 44년 말 끝이 났다. 노르망디 D-데이 당일, 스페인을 거쳐 영국으로 도피했던 자닌 남매는 벨기에 탈환 직후 귀국했고, 종전 후 벨기에와 영-미, 프랑스 정부의 여러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전시 MI9에 관한 책을 쓴 영국 사학자 헨리 프라이(Henry Fry)는 자닌을 "민간 비밀 군대의 필수요원"이자 "핵심 활동가(key figure)"였다고 소개했다.

코밋 라인 활동가 중 700여 명이 나치에 체포돼 250여 명이 처형되거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영국 군사학자 풋(M.R.D.Foot, 1919~2012)은 "대다수 여성이었던 그들 활동가와 안전가옥 조력자들의 용기와 헌신이 없었다면, 탈출 라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후 자닌은 벨기에 주재 영국대사관 상무관으로 일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는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서 여러 종교를 공부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말년에는 브뤼셀 집 인근 길 고양이 먹이 주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프라이버시를 무척 중시해 코밋 라인 기념행사 외엔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인터뷰 요청도 늘 마다하곤 했다. 2010년 한 모임에 참석한 그에게 기자가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 대담한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자닌은 "우리는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자면 겁 먹지 않아야 했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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