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로보캅’부터 차세대 영웅 ‘아이언맨’까지. 기계와 인간이 결합한 영화 속 사이보그는 말 그대로 슈퍼히어로다. 강철 팔, 무쇠다리, 막강 수트 앞에선 어떤 적들의 공격도 ‘무용’하다. 하지만 김원영 변호사(39)와 SF소설가 김초엽(28) 작가가 경험한 현실 속 사이보그는 슈퍼히어로와는 거리가 멀다. 지체장애와 청각장애를 지닌 두 사람은 각각의 장애를 보완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휠체어와 보청기를 사용한다. 따지고 보면 현실 속 최전선 사이보그 전사들인 셈이다.
그러나 무적과 만능의 아이콘으로 그려지는 영화와 달리 현실 속 그들의 ‘무기’는 인간과의 결합에서 매끄럽지 못하다. 현실의 기계는 피부를 짓무르게 하고, 끊임없이 잔고장이 나며, 너무 가격이 비싸서 아예 범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기술이 ‘무용’해지는 순간이다. ‘과학, 기술, 의학이 언젠가 장애를 완벽하게 종식하고 해결해줄 수 있을까.’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기술은 누구의 주도로, 누구를 위해서, 개발되고 보급되어야 하나.’ 두 사람의 고민을 엮은 ‘사이보그가 되다’ 출간에 맞춰 이메일로 인터뷰를 나눴다.
시작은 16년 전 황우석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 변호사는 학교 정문에서 매일 모여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장애인과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 황 교수의 연구가 허위로 판명 났음에도, 그들은 황 교수를 끝내 버리지 못했다. ‘앉은뱅이가 예수님의 은총을 받아 일어나 걸었다’는 성경 구절을 현실로 만들어줄 구세주였기에. “왜 꼭 걸어야 할까. ‘걷지 않아도 좋으니, 당당히 일어나라’라고 예수님이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김 변호사의 고민은 2018년 12월 김초엽 작가와의 협업이 본격화하면서 과학 기술과 장애란 질문으로 더욱 또렷해졌다.
과학과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두 사람은 한발 더 들어가 기술이 ‘비장애중심주의’를 향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비판한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장애가 없는 상태가 가장 정상적이고, 이상적이라고 보는 이데올로기다. 기본적으로 “장애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치료와 교정의 대상”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그 믿음이 극대화된 ‘테크노에이블리즘’은 첨단 기술 발전이 인간을 장애라는 '비극'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약속의 이미지만을 남발한다. 두 사람은 그런 유토피아적 기술 담론이 장애를 더 소외시키거나, 소비하는 대상으로 납작하게 만든다고 꼬집는다.
“장애를 ‘소거하는’ 기술은 언제나 바람직할까요. 또 과연 소거는 가능할까요.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덜어주는 기술이라도 그 기술에 대한 경제적·사회적 접근성,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상당한 경우라면 어떨 까요. 예를 들어 웨어러블 로봇을 입고 자연스럽게 걷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간과 비용이라면 휠체어라는 좀 더 간편한 기계와 함께 하루라도 빨리 사회로 나와 일상을 누리는 게 나은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김원영)
그렇다고 두 사람이 기술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기술이 “지금 이곳의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장벽을 해결하는 일”보다는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하며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언젠가’ 발전할 미래로 자꾸만 유예시키고 있어서”(김초엽) 문제라는 거다. 지금, 여기 현실을 사는 장애인들에겐 먼 미래의 로봇외골격 연구보다 휠체어 경사로를 설치하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될지 모른다. 완벽한 보청기와 인공 와우 수술로 청력을 되찾는 것만큼이나 문자 통역이 보다 많이 제공돼 오늘의 소통 환경이 나아지길 간절히 바라는 장애인들도 적지 않다.
후자의 기술들은 이미 지금도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일들. 하지만 이런 소박한 바람은 ‘정상’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쉽게 묵살되고 만다. 김 변호사는 1층 식당의 접근성을 표시한 베리어프리 지도 앱을 예로 들며,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부정하지 않도록, 현재 몸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도록 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공유되면 좋겠다”고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기술은 장애를 종식시킬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공고한 비장애중심주의를 깨트리지 않고선, 손상과 취약함, 의존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한 얘기라고 단언한다.
“비장애중심주의, 즉 무능력하고 취약하고 의존적인 몸을 멸시하는 사회 구조와 낙인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누군가는 배제될 수밖에 없어요. 설령 그런 몸을 '장애인'이라고 지칭하지 않더라도, 노화로 인해 약해지는 몸이나 질환을 가진 사람 등은 존재할 것이고 몸에 대한 위계는 남기 마련이니까요. 비장애중심주의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기술은 또 다른 억압이자 강요가 될 수 있고, 기술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또 한번 배제하며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김초엽)
두 사람이 스스로를 사이보그라 칭했던 건 “사이보그란 이름에 부여된 최첨단의 이미지를 해체하기 위해서”(김초엽) 그리고 “인간과 기계가 결합했다는 걸 넘어 활동지원사나 안내견처럼 이질적인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독립적이고 유능하며, 이상적 존재로만 그려졌던 사이보그는 이제 재정의돼야 한다. 삐걱대고, 녹슬고, 취약한, 그래서 타자와의 연결과 돌봄을 통해 서로 이어지는, 완벽하지 않은 사이보그에서 우리는 더 큰 희망의 실타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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