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타트업의 하이브리드 DNA
"빠르게 흡수하고 받아들여라"
그러나 지나친 기대는 금물
"정부가 오픈 이노베이션 연결 역할을"
미국 면도기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은 신생기업(스타트업) 달러 쉐이브 클럽(DSC)은 독특한 방식으로 2011년 사업을 시작했다. 매달 1~9달러를 내면 4,5개의 면도날을 보내줬다. 당시 미국인들은 매달 평균 20달러를 안전 면도기의 면도날 교체에 썼다.
면도날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DSC가 면도날을 싸게 팔 수 있었던 것은 한 기업을 만난 것이 결정적이었다. 바로 한국의 도루코다. DSC는 도루코에서 면도날을 싸게 공급받아 당시 미국 면도기 시장의 70%를 장악한 세계 1위 질레트에 굴하지 않고 온라인 시장 점유율을 50% 이상 끌어올릴 수 있었다. 결국 프리미엄 고가 전략을 고수했던 질레트는 DSC 때문에 마케팅 전략을 수정했다.
미국 시장 진출이 절실했던 도루코는 DSC와 손잡으면서 안전장치로 주식 매수청구권을 포함시켰고 2017년 이를 팔아 590억원을 벌었다. 도루코가 전년도 거둔 영업이익 472억원보다 많은 액수다.
DSC와 도루코는 큰 기업과 스타트업이 손잡고 혁신을 추구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특히 스타트업이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어떤 효과를 볼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산시설이 전무한 DSC는 부족한 부분을 도루코를 통해 채웠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스타트업의 ‘하이브리드 DNA’가 제대로 빛을 본 것이다.
업계에서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성공하려면 스타트업의 하이브리드 DNA를 적극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레이저로 수질 오염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스타트업 더웨이브톡의 김영덕 대표는 “스타트업이 생산과 판매, 고객서비스까지 하면 언제 연구개발을 하겠냐”며 “국내에서 창업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려면 DSC와 도루코처럼 각자 잘하는 역량을 결합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사례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아이들의 육아앨범을 만들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제제미미는 최대 고민이 마케팅이었다. 지난해 4월 창업했으나 어떻게 사업을 알리고 이용자를 모집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 난감했다. 그때 교보생명의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인 ‘교보 이노스테이지’를 알게 돼 지난해 7월 합류하면서 고민을 해결했다. 박미영 제제미미 공동대표는 “오랜 세월 다양한 마케팅을 해 본 교보생명에서 멘토링을 잘해줘 전혀 모르던 마케팅을 제대로 배웠다”며 “덕분에 초창기 3,000명이었던 이용자가 이후 8만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프리콩은 하하, 윤보미, 홍현희 등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웹 예능과 웹 드라마 등을 만들어 이름을 알린 콘텐츠 스타트업이다. 콘텐츠 제작사들의 고민은 안정적인 제작을 위한 지속적인 지원이다. 프리콩은 동영상 플랫폼 서비스인 아프리카TV를 만나면서 고민을 해결했다. 마침 넷플릭스처럼 독자 콘텐츠를 갖고 싶었던 아프리카TV는 프리콩에 투자해 지분 85%를 확보했다. 박현우 프리콩 대표는 “아프리카TV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게 됐고 프리콩은 아프리카TV의 투자로 안정적인 제작 환경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GS그룹과 스타트업 위쿡이 함께 만든 ‘넥스트 푸디콘’은 스타트업의 하이브리드 DNA를 살리기 위해 마련한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GS리테일과 GS홈쇼핑, 위쿡이 함께 식음료 스타트업을 발굴해 12주 동안 상품성 개선 방안을 알려주고 판매채널로 입점시켜 유통까지 돕는 내용이다. 강혜원 위쿡 부대표는 “스타트업들은 이를 통해 더 많은 성장 기회를 갖게 됐다”며 “성장이 더딘 식음료 시장의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과에 대해 대기업이나 스타트업 모두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임정욱 TBT 공동대표는 “대기업은 스타트업이 아주 혁신적일 것으로 생각하고 스타트업은 대기업과 손잡으면 무엇이든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며 “스타트업과 대기업 모두 과도한 기대를 버리고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적인 오픈 이노베이션을 위해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최항집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스타트업들은 오픈 이노베이션 관련 정보가 부족하다”며 “정부에서 대기업의 오픈 이노베이션 담당자나 기업내벤처투자업체(CVC)를 스타트업에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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