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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니 수술비는 현금만" 낙태죄 사라져도 바뀐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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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이니 수술비는 현금만" 낙태죄 사라져도 바뀐 건 없었다

입력
2021.01.20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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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별로 수술 여부·가격 천차만별
국회 대체입법 없어 여전히 제도적 공백
조속한 실태조사·가이드라인 등 절실해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절 수술 하신다고요? 원래는 10주까지만 되는데... 10주면 100만원 이상, 12주면 120만원 정도 생각하셔야 하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어요. 아 참, 결제는 현금만 되고요. 아직 불법이거든요."

서울 강북의 한 산부인과에 전화로 인공 임신중절(낙태) 수술을 문의하니, 직원이 목소리를 확 낮추며 상담을 이어 나갔다. 임신 10주차라고 답하자 직원은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12주까지 수술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답을 내놨다. 정확한 수술비는 영업 비밀이지만 '불법 수술'이니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낙태죄가 올해부터 사라지지 않았나요"라고 되묻자, 자신은 불법으로 알고 있다며 현금을 가져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바뀐 게 없다

헌재가 2019년 4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대체 입법을 마련하라고 제시한 데드라인은 지난해 말이었다. 1년 8개월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국회는 결국 대체 법안 마련에 실패했다.

결국 아무 대안도 없이 올해 1월 1일부터 낙태 행위를 죄로 다스리는 법 조항만 효력을 잃었다. 낙태 문제는 이제 '형법상 범죄'만 아닐 뿐, 관련법과 정책도 없으며 사회적 합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거대한 공백지대'로 남은 셈이다.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이 산부인과 전문의들의 혼선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말 내놓은 '임신 주차에 따른 낙태수술 권고안'이 가이드라인의 전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낙태죄' 개정 관련 공청회가 지난해 12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낙태죄' 개정 관련 공청회가 지난해 12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와 국회가 낙태에 관한 후속 법령과 정책을 전혀 마련해 놓지 않으면서, 현장에선 낙태 수술 시행 여부와 방법을 두고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일보가 서울 시내 산부인과 20여 곳에 문의한 결과, 산부인과마다 △낙태 수술 가능 여부 △수술이 가능한 임신 주차 △수술 비용 등이 천차만별이었다.

실제 상담결과 수술 가능 임신 주차는 병원에 따라 10~22주로 다양했고, 가격은 12주차 기준으로 120만~180만원으로 차이가 컸다. 서초구의 A산부인과는 "12주차를 기준으로 150만원대이지만, 임신 주차가 길어질 수록 비용이 올라간다"며 "초음파와 태반 위치 등을 보고 위험도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건강보험 적용은 받지 못한다.

명확한 기준과 정보가 없는 여성들은 여전히 인터넷이나 익명채팅방을 통해 중절 수술 관련 정보를 알음알음 구하고 있다. 건강과 비용 부담을 이유로 하루 빨리 수술을 해야하는데 조건에 맞는 병원을 알아보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도 있다.

의료진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 개인적 신념에 따라 낙태 수술을 거부하는 의료진들은 "환자가 요구하면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하냐"며 거부 권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현행 의료법상 의사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낙태 수술 거부가 위법 논란에 휘말릴 수도 있는 것이다. 김수미 가톨릭대 산부인과 전문의는 "거부할 권리가 없으면, 환자가 소송을 걸 위험성도 있다"며 "의사의 소명에 따라 낙태 수술은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할 거부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충훈 대한산부인과협회 회장도 "의사 개인의 신념이 진료 거부를 할 수 있는 거부권을 (관련 법령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불법 유산유도제, 혼란 틈 타 합법인냥 기승

익명채팅방을 통해 유산유도제를 불법으로 유통하고 있는 모습. 카카오톡 캡처

익명채팅방을 통해 유산유도제를 불법으로 유통하고 있는 모습. 카카오톡 캡처

법적·제도적 공백을 틈타 허가 받지 않은 불법 유산유도제들까지 합법인냥 팔리며, 여성들의 건강권까지 위협받고 있다. 판매업자들은 "낙태죄가 폐지됐다"는 말로 임신부들을 안심시키며 의약품 불법 구매를 유도하고 있다. 카카오톡 익명 채팅방을 통해 유산유도제 '미프진'을 판매하는 한 업자는 "약물을 통한 유산은 낙태 흔적도 남지 않고, 수술에 비해 비교적 간편하고 안전하다"며 "하루에 50여건 주문이 접수될 정도로 인기가 좋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약사법상 불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아직 국내 판매가 허용된 유산유도제는 없고, 허가를 신청한 업체도 없다. 식약처 관계자는 "낙태죄 여부를 떠나 약을 판매하려면 식약처에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한다"면서 "어디서, 어떻게, 누가 이 약을 만들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해 유산유도제를 구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건강권과 생명권이라는 가치가 동시가 결부된 이 중요한 낙태 문제를 여성 개인이나 의사의 임의적 판단에 맡기는 '제도적 공백'를 조속히 끝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나영(활동명) 대표는 "더 이상 법 개정만을 기다리지 말고, 보건복지부나 식약처등 관계부처를 중심으로 임신중절 수술과 관련한 실태를 파악하는 등 움직임이 이뤄져야 한다"며 "이와 동시에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 등 임신중절이 보건의료 시스템 속에 편입될 수 있을지를 중심으로 법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지혜 기자
우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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