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스 체슬러는 1970년대 2세대 페미니즘을 개척한 인물이다.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 참정권 등 제도적 성 평등에 집중했다면, 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을 둘러싼 문제를 전방위로 공론화 했다. 성폭력, 낙태, 가부장제, 부부 강간, 경제적 차별과 평등권 등 “페미니스트로 사는 내내 이곳 저곳에 있었다”고 할 만큼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핏대 높여가며 사력을 다해 싸웠다.
힘겹고 험난했지만 그래서 더 찬란하게 빛났던 2세대 페미니즘이 걸어왔던 여정이 체슬러의 회고로 펼쳐진다. 책에는 승리의 기록만 있는 건 아니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서로에게 관대하다가도, 서로를 질투하고 경계했으며, 연대하면서도 경쟁하기를 반복했다.
체슬러는 그 살벌한 '내전'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 대부분은 지독하고 노골적인 싸움에 심리적으로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여자들은 모든 갈등을 정치적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겪어냈다.” 사회가 주입한 혐오와 차별, 갈등을 내면화한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미숙하고 불완전했다.
체슬러도 배신으로 상처를 입었다. 흑인이었던 직장 상사로부터 강간을 당했을 때, 그의 동료들은 “백인 페미니스트 단체가 흑인 남성을 폭로하면 자칫 미국 페미니즘이 인종차별을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폭로를 막았다.
그렇다고 2세대 페미니즘이 멈춰서거나 무너졌던 건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분열이 주변을 휩쓸고 갔을 때도 우리는 서로를 꼭 붙들었다.” 한계나 실수를 인정했고, 서로의 다름을 기꺼이 견디며, 끝까지 버텼다. 체슬러가 2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는 감사의 말에서 함께 투쟁했던 수많은 자매들을 일일이 호명한다. 선두에 가려져 조명 받지 못했거나, 익명으로 참여한 수많은 여성들까지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마음에서다. 50년 전 체슬러와 동료들이 싸웠던 문제들은 2021년에도 여전히 남아 있고, 서로 할퀴고 생채기를 내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내전도 현재진행형인 듯 하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건, “끝까지 붙들라”는 체슬러의 진심어린 위로와 응원 덕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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