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8,000여명 자격증 취득해 활동
사라진 지체장애인 3년 만에 찾기도
산재·의료사고·보험사기로 보폭 넓혀
도청·비밀촬영… 불법 정보수집 논란도
"경찰서도 가봤지만 1,000만원도 안 되는 소액이라, 경찰이 나서기 어려운 눈치더라고요. 고민하다가 탐정사무소 문을 두드렸죠."
자영업자 김모(53)씨는 평소 보험거래를 하던 설계사에게 지난해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비트코인 생태계를 잘 알고 있으니, 700만원을 맡기면 1년 안에 10배를 벌게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설계사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라서 김씨는 큰 의심 없이 돈을 입금했지만, 1년이 넘도록 약속한 수익금은 물론 원금조차 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설계사가 알려준 해외 비트코인 사이트도 접속 불가 상태다. 김씨는 설계사를 고소하기 위해 수사기관을 찾았으나, 경찰서 수사민원 상담센터에선 "사이트 서버가 해외와 얽혀있어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란 답변을 내놨다.
김씨가 고심 끝에 돌파구로 찾은 곳은 서울 중림동의 한 탐정 사무소였다. "확실한 증거를 제출한다면 수사도 부담 없이 개시될 것"이란 생각이었다. 탐정들 도움을 받아 김씨는 해당 설계사가 관여한 대화기록 등 자료 일부를 얻었다. 그 과정에서 중간책으로 추정되는 인물 2명의 신원도 알게 됐다. 김씨는 최근 이 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설계사 측에 내용 증명을 보낸 뒤, 경찰에 고소를 준비 중이다.
대한민국 탐정들 무슨 일 하고 있나
2005년 국회에서 탐정업 관련 법안이 처음 발의된 후 15년간 제자리 걸음만 했던 탐정업 공인화 논의가 최근 다시 불붙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국민 수요 충족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인 탐정제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한 후, 지난해 8월 개정 신용정보법에 따라 탐정 명칭을 이용한 영리활동이 가능해졌다. 경찰청도 올해 초 탐정업 관련 민간자격 발급기관에 대해 현장 지도·점검을 거쳐 음성적으로 이뤄진 탐정업 폐해를 줄이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경찰이 지난해 탐정업 관련 민간자격 발급기관을 점검한 결과 모두 12개 업체에서 민간조사사 및 사실조사분석사 등의 명칭으로 14개의 민간자격증을 발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한탐정연합회에 따르면 국내에선 8,000여명의 탐정(민간조사원)들이 민간 자격증을 취득하고 영업 중이다.
국내 탐정들의 대표적 활동 영역은 실종 사건 해결 도우미 역할이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수사가 어려워지는 반면에 인력 공급이나 기관 협조가 쉽지 않아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한탐정연합회에 따르면 2015년 충청 지역에서 사라진 20대 지체장애인 A씨를 찾는 과정에서도 탐정의 역할이 컸다. 실종 후 3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자, 생사라도 알아야겠다는 심정에 모친은 뒤늦게 탐정을 찾았다.
8개월간의 지역 탐사 끝에 실종 당시 피해자가 마을버스에서 내려 낯선 차량에 올라탔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동선 추적 결과 2018년 인근 섬 지역에 붙잡혀 있는 피해자가 발견됐다. 연합회 관계자는 "판단력이 미숙했던 피해자는 숙식이 제공되는 환경에 안주한 채,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엔 경찰 조사 결과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난 30대 남성의 유족들이 탐정을 찾았다. 유족들은 "평소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던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으니 알아봐달라"고 호소했고, 탐정은 5개월간 고인의 사망 당시 행적 등을 추적했다고 한다. 그 결과 남성이 사망 직전 지인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 문자를 보낸 사실과 여러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했던 기록이 확인됐다. 무엇보다 검안의와의 대화기록을 포함해 여러 자료를 종합한 탐정은, 지난해 12월 말 수사 이의제기서를 작성해 유족에게 넘겼다. 현재 해당 사건은 경찰의 재수사 절차를 밟고 있다.
산업재해나 의료사고 입증을 위해 탐정을 찾는 이들도 있다. 특히 산업재해의 경우 다수의 탐정들은 해당 기업·기관에 직접 취업해 회사 책임을 입증하기도 한다. 수사기관 출신으로 5년째 탐정업을 하는 권대원(61)씨 역시 지난해 일터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근무 환경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공사 현장의 인부로 출근했다. 권씨는 "일하며 살핀 현장 상황을 기반으로 증거를 모아 보고서를 작성했고, 결국 고용노동부에서 유족들이 산재 처리를 받을 수 있었다"며 "적법하게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입증에 도움을 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권씨는 5년간 의뢰된 사건 50건을 해결했고, 현재도 사건 8건을 조사 중이다.
보험사들의 수사의뢰 사건이 늘고 있는 보험사기도 탐정사무소가 집중하는 영역이다. 서울 중구에서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는 이종학(72)씨는 현재 경찰 출신이자 보험조사팀(SIU) 근무 경력을 가진 직원 2명과 일하고 있다. 이씨는 "업무가 과중한 경찰이 보험금 허위 수령 여부를 처음부터 일일이 살필 수는 없다"며 "허위 진단서 한 장만으로도 보험금을 타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험료 손실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해마다 증가하는 단발성 보험사기 영역에서 탐정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흥신소' 변질 우려 막으려면
탐정 활동이 국가 수사기관의 공백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란 목소리가 나오지만, 우려의 시선도 여전하다. 특히 변호사업계는 개인정보 침해 등을 이유로 꾸준히 법안 통과에 반대 목소리를 내왔다. 탐정들의 정보수집 방법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불법성 논란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이충윤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은 "탐정업을 빙자해 개인정보 불법 수집행위, 도청, 비밀 촬영 등이 만연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변협은 수사기관 출신들이 탐정사무소를 개소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전관 비리를 조장할 우려도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지난해 대한탐정연합회가 발급하는 민간자격증 취득자 가운데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수사기관 출신이 86%(1,410명 중 1,222명)에 달했다.
탐정의 업무범위는 변호사법과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명확히 제한되지만, 여전히 불법영역인 심부름센터와 혼동해 '불륜 상대 뒷조사' 등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탐정업계 종사자들은 정부의 관리감독 강화를 위해서라도 탐정업법 통과를 통한 양성화가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도 대부분 탐정업을 제도화한 상태이며, 미국과 일본에선 각각 6만여명의 탐정들이 활동하고 있다. 권씨는 "업무범위를 명확히 하고 단속하는 게 오히려 탐정 이름을 내건 불법 활동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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