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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를 가장한 일침...풍류에 빠진 정치인 구양수를 저격하다

입력
2021.01.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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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장쑤성 ② 양저우 수서호와 대명사, 최치원기념관과 개원


얼마 전 광풍을 따라 북방을 표류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양자강으로 돌아왔네(?日??北海游 回??子大江?). 변치 않는 마음으로 지남철 되어, 다시는 남쪽을 향해 절대 서지 않으리라(臣心一片磁?石 不指南方不肯休).

문천상의 '양자강' 중에서

중국 4대 정원인 양저우 개원의 총서루. 창문을 감싼 넝쿨이 세월을 감싼 듯하다. ⓒ최종명

중국 4대 정원인 양저우 개원의 총서루. 창문을 감싼 넝쿨이 세월을 감싼 듯하다. ⓒ최종명


남송 정치가 문천상이 지은 ‘양자강’이다. 황제의 명으로 원나라와 담판을 했으나 실패했다. 수도 임안(지금의 항저우)이 함락돼 남송이 멸망했다. 포로가 돼 송환되던 중 탈주했다. 장강을 건너 남하하던 심정이 오죽했으랴. 나라를 잃은 마음을 담아 노래했다. 원나라에 저항하겠다는 의지도 담겼다. ‘마지막 충신’ 문천상은 푸젠과 저장, 광둥 일대에서 항전을 지속하다가 체포됐다. 수도인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압송됐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사형당했다. 항전 중에 저장성 타오주(桃渚)에 있는 천장암에 올라 풍광을 바라보며 감회를 읊었다. 전국에 그의 흔적이 아주 많다. 나라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물의 됨됨이가 드러나지 않겠는가?

저장성 타오주에 있는 문천상 조각상. ⓒ최종명

저장성 타오주에 있는 문천상 조각상. ⓒ최종명

사실 양자강이란 강은 없다. 장강의 별칭이란 말도 어쩌면 틀렸다. 양저우를 지나는 구간을 부른다고 하지만, 그런 지명은 없다. 양저우는 물산이 풍부한 장강 삼각주의 역사문화 도시로 장강과 대운하가 교차한다. 한나라 시대에는 ‘장강과 회수의 물이 모두 모인다’는 강도(江都)였다. 1952년에 시작한 남수북조(南水北?), 남방의 물을 북방으로 끌어가는 사업의 발원지 중 하나다. ‘전대에 돈을 가득 넣고 학을 타고 양주로 가고 싶다’는 은운의 글이 생각난다. 돈과 명예, 장수를 상징하는 양주지학(?州之?)의 땅으로 간다.

항저우에 서호가 있다면 양저우에는 수서호

양저우 수서호 중심에 오정교와 백탑. ⓒ최종명

양저우 수서호 중심에 오정교와 백탑. ⓒ최종명

잔잔한 수서호(瘦西湖)가 있다. 청나라 강희제가 다녀가자 전당(지금의 항저우)의 시인 왕항이 왔다. ‘수양버들 우거지고 무지개다리로 기러기 날아다니는’ 호수라는 감상을 남겼다. 고향 서호와 비교해 ‘수서호로 바꾸어야 하리’라 했다. 원래는 보장호(保障湖)였다. 소금과자(?金?子)라고도 했다. ‘도금된 신선로’라는 뜻이니 예로부터 부유한 도시를 잘 표현한 셈이다. 남방 순행이 많았던 건륭제도 여러 번 다녀갔다. 1757년 건륭제가 처음 수서호를 방문했다. 황제를 환영하기 위해 관리와 지역 염상(?商)이 호수 중심에 오정교(五亭?)를 세웠다. 정자 5개를 지고 있는 다리는 황제를 기쁘게 했으리라. 정말 웅장한 기세다.

양저우 수서호의 오정교와 이십사교. ⓒ최종명

양저우 수서호의 오정교와 이십사교. ⓒ최종명


수서호의 나룻배을 타고 본 이십사교. ⓒ최종명

수서호의 나룻배을 타고 본 이십사교. ⓒ최종명

오정교를 건너 호반을 따라 걷는다. 새소리 지저귀고 바람 따라 나뭇가지가 사각거린다. 이십사교(二十四?) 팻말을 보고 다리를 찾으니 한참 멀다. 다리만 아니라 주변 풍광과 함께 보라는 뜻이다. 가까이 갈수록 속속들이 드러나나 싶었다. 다리까지 가기도 전에 유람선이 출발하는 선착장에서 사람들을 따라 후다닥 올라타고 말았다. 배에서 뒤돌아보니 다리가 유난히 봉긋하다. 길이가 24m, 너비가 2.4m, 다리 위에서 양쪽 바닥까지 계단이 각각 24개, 난간 기둥도 24개다.

수서호의 처녀 뱃사공. ⓒ최종명

수서호의 처녀 뱃사공. ⓒ최종명

노 젓는 소리가 살랑거린다. 노와 연결된 밧줄을 살살 당기니 나룻배가 움직인다. 수더분한 인상의 처녀 뱃사공은 손님에게 노를 저어봐도 좋다고 한다. 호숫물이 노할 이유도 없고 수심도 깊지 않다. 사진을 찍어도 그저 웃는다. 민가를 불러주겠다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뽐낸다. 사투리를 섞어 부르니 알아듣지 못해도, 가녀리면서 담백한 노래가 귓전을 파고들고 청아한 호수 위로 퍼져간다. 노래를 마치니 오정교 밑을 지나고 있다.

양저우 수서호의 조어대. ⓒ최종명

양저우 수서호의 조어대. ⓒ최종명

나룻배가 지나는 길에 정자가 하나 있다. 삼면이 동그랗게 뚫려 시원해 보인다. 건륭제가 낚시를 한 조어대(??台)다. 어김없이 전설이 담겼다. 염상은 황제가 물고기를 잡지 못할까 염려가 됐다. 어부는 잠수해 연잎으로 위장하고 대롱으로 숨을 쉬며 황제의 낚시 바늘에 물고기를 엮었다. 용어(??)였다. ‘황제의 관상어’라 불리는 희귀 어류다. 비늘이 크고 등과 배, 꼬리지느러미 모양이 아름답고 현란해 예로부터 보기 드문 민물고기였다. 황제가 바보는 아니었으니 금세 눈치를 챘다. ‘수서호에는 어찌 용어만 있단 말이냐? 황제를 우롱한 죄를 묻겠다!’고 했다. 대학사 기효람은 언제나 기발한 이야기꾼으로 등장한다. ‘황제의 바늘만이 용을 낚는구나!’고 덕담하니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양저우 수서호의 옥판교. ⓒ최종명

양저우 수서호의 옥판교. ⓒ최종명

항저우의 서호가 광활한 바다 같다면 수서호는 흐르지 않는 도랑 같다. 수(瘦)는 비(肥)의 반대말이다. 날씬한 호수라는 미명과 어울린다. 서호에 서시 이야기가 있다면, 수서호에는 조비연이 있다. 한나라 성제의 첩이었다가 황후가 된 인물로 4대 미인에 버금간다. 얼마나 가냘픈 몸매였던지 바람에 날려 강물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발목을 잡은 황제의 손 위에서 춤을 췄다는 미인담(美人?)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가녀린 허리 같은 호수 위에 군데군데 다리도 많다. 옥판교(玉版?)를 건너 수서호를 떠난다.

중국 10대 사찰로 꼽는 양저우의 고찰 대명사 패방과 산문. ⓒ최종명

중국 10대 사찰로 꼽는 양저우의 고찰 대명사 패방과 산문. ⓒ최종명

수서호 북쪽에 1,500년 역사의 대명사(大明寺)가 있다. 5세기 중반 남북조 시대의 송나라(역사에서는 유송이라 함) 효무제의 연호가 대명이다. 수나라는 서령사(栖?寺)라 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름이 변했는데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는 대명을 꺼려 피휘(避?)했다. 양저우를 순행한 건륭제는 법정사(法?寺)로 부르라 했다. 1980년에 이름을 회복했다. 중국 10대 사찰로 꼽을 정도다. 서령유지(栖??址) 패방을 거쳐 산문을 지난다.

양저우 대명사의 누운탑. ⓒ최종명

양저우 대명사의 누운탑. ⓒ최종명

581년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은 나라가 안정되자 601년에 자신의 생일을 맞아 전국에 30개의 탑을 세우고 부처의 사리를 봉공했다. 9층 높이의 서령탑이 대웅보전 동쪽에 우뚝 솟아있다. 애석하게도 당나라 시대에 초토화됐다. 1980년대 사찰 이름을 회복한 후 다시 건립했다. 3층에 누운탑(?云塔) 편액을 걸었는데 살짝 미소 짓게 된다. 지하 4m, 높이 70m의 탑이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명성에 어울리는 웅비를 담고 있다. 이백, 유우석, 백거이를 비롯해 당나라 시대 유명 시인은 모두 탑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양저우 대명사의 감진 대사 조각상 ⓒ최종명

양저우 대명사의 감진 대사 조각상 ⓒ최종명

당나라 승려인 감진 대사가 설법을 했던 사찰이다. 유학 온 승려의 간청이 이어지자 일본으로 포교를 가려고 했다. 관청의 반대와 기상 악화로 다섯 차례나 실패했다. 이때 두 눈이 멀었고 여섯 번째 만에 바다를 건넜다. 일본 율종의 조사가 됐다. 일본의 천황, 황후, 태자 등에게 보살계를 전수했으며 80여명의 승려를 양성했다. 중일 불교 교류의 상징이 된 대사의 기념관에 두 눈을 감은 모습으로 앉았다. 조각상 뒤로 양저우의 상징인 학 한 쌍이 날아다니고 있다.

대명사 풍류완재와 평산당. ⓒ최종명

대명사 풍류완재와 평산당. ⓒ최종명

대명사에는 북송의 정치가인 구양수가 건축한 평산당(平山堂)이 있다. 당송팔대가이자 천고문장사대가(千古文章四大家)로 평가받는 그가 양주태수로 부임했다. 주위에 호수와 정자가 있으니 술 마시고 시 짓고 유유자적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오죽하면 호를 취옹(醉翁)이라 했을까? 왼쪽에 걸린 편액 풍류완재(?流宛在)는 내공이 느껴지는 명필이다. 청나라 광서제 때 양강총독(?江?督)인 유곤이 썼다. 자세히 보면 류(流)에 제4획인 점이 없다. 재(在)에 그 점이 달라붙어 있다. 구양수에 대한 약간의 불만 토로였다. 행정을 돌보지 않고 풍류에만 몰두한 관리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다. 풍류를 줄이고 실재(?在)에 힘쓰라는 뜻이다. 글을 모르면 모를까, 선비는 신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붓을 들었다. 오류를 가장한 파격에 한동안 눈길을 떼기 힘들었다.

양저우에 최치원기념관을 세운 이유

최치원 기념관이 있는 양저우 당성유지 입구. ⓒ최종명

최치원 기념관이 있는 양저우 당성유지 입구. ⓒ최종명

대명사 동쪽에 당성유지(唐城?址)가 있다. 수나라 양제의 행궁이 있던 자리에 쌓은 당나라 시대 성벽 유적이다. 1979년에 신축했으며 웅장하게 지어 계단도 가파른 편이다. 그저 평범한 당나라 유물 전시관인데 동쪽에 최치원 기념관이 있다.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해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科)를 통과했다. 이후 양저우 인근 리수이에서 약 3년간 관리로 근무했다.

당성유지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조각상. ⓒ최종명

당성유지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조각상. ⓒ최종명


최치원 기념관 전시실 입구의 ‘천년의 기억을 뛰어넘어’. ⓒ최종명

최치원 기념관 전시실 입구의 ‘천년의 기억을 뛰어넘어’. ⓒ최종명


최치원 기념관 2층 전시실. ⓒ최종명

최치원 기념관 2층 전시실. ⓒ최종명

양저우 풍광을 그린 승적도(?迹?)를 배경으로 최치원 조각상이 있다. 고운 최치원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2007년 10월에 기증했다. 2층 전시실 입구에 ‘천년의 기억을 뛰어넘어(跨越千年的??)’라는 문구가 반갑게 맞아준다.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중국 왕조와 교류한 신라 고려 조선의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최치원과 함께 중국 땅에 기념관이 있는 장보고를 비롯해 여러 역사 인물의 행적도 전시한다.

양저우 최치원 기념관 옆에 있는 한중 수교 15주년 기념비. ⓒ최종명

양저우 최치원 기념관 옆에 있는 한중 수교 15주년 기념비. ⓒ최종명


타오주 고성 주민이 세운 중한민간우호비. ⓒ최종명

타오주 고성 주민이 세운 중한민간우호비. ⓒ최종명

바깥으로 나와 왼쪽으로 회랑을 따라가니 한중 수교 15주년 기념비가 있다. ‘중한건교15주년기념비(中?建交十五周年?念碑)’ 아래 2007년 10월이라 적혀 있다. 최치원 조각상이 설치될 때 한국의 한 협회가 기증해 함께 세웠다. 중국 땅에 외국인 이름의 기념관을 두려면 중앙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하얼빈의 안중근의사 기념관, 룽청의 장보고 기념관도 있다. 문천상이 지나간 타오주의 고성에는 중한민간우호비(中?民?友好碑)가 있다. 조선 중기 제주도에서 표류한 선비 최부가 심문을 받은 장소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더 가치가 높은 ‘표해록’의 저자 최부를 기념해 고성의 주민이 세웠다. 중국인이 세운 비석이라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중국 4대 정원, 개원을 거닐다

중국 4대 정원으로 유명한 양저우의 개원 입구. ⓒ최종명

중국 4대 정원으로 유명한 양저우의 개원 입구. ⓒ최종명

수서호 동쪽에 강남 정원 저택인 개원(??)이 있다. 1818년에 염상 황지균(?至筠)이 지었다. 다양한 품종의 대나무가 입구부터 숲을 이루고 있다. 이부, 호부, 예부, 병부까지 4부의 시랑(侍郞)을 역임한 유봉호가 다녀갔다. ‘연못이 수려하고 수목은 거문고 같으며 1만 가지 죽간이 있어 개원이라 한다’는 기행문을 남겼다. 대나무와 개(?)는 무슨 관계인가? 개인이나 자기 자신이란 뜻이 있으니 대나무 균(筠), 자기 이름으로 지었구나 생각했다. 아무리 장사치라도 흔한 작명은 아니다. 생각보다 고상한 근거가 있으니 사마천의 ‘사기’를 끄집어내야 한다.

저택으로 들어서니 총서루(叢書樓)가 있다. 2층 창문을 감싸는 넝쿨이 세월을 그린 듯하다. 저절로 책이 손에 잡히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당연한 말이지만, 1956년 한자간화방안(?字?化方案)이 공포되기 전 글자다. ‘사기’의 화식열전(?殖列?)에 ‘죽간만개(竹竿萬個)’라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학자 장수절은 주석인 ‘사기정의(史?正?)’에서 ‘죽은 가로되 개(竹曰個)’라 했다. 대나무 ‘죽’에서 반을 생략하면 ‘개’라는 의미를 가진다. 개는 ‘반죽’이었다. 대나무 장대인 죽간, 뿌리와 잎을 빼니 개원은 반죽원(半竹?)인 셈이다. 개(?)가 대나무 모양과 비슷하다는 유머도 있다.

중국 4대 정원으로 유명한 양저우의 개원의 원동문. ⓒ최종명

중국 4대 정원으로 유명한 양저우의 개원의 원동문. ⓒ최종명


중국 4대 정원으로 유명한 양저우의 개원의 연못과 가산. ⓒ최종명

중국 4대 정원으로 유명한 양저우의 개원의 연못과 가산. ⓒ최종명

‘고기를 먹지 못할지언정 대나무 없는 집에서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고기를 먹지 못하면 수척해지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저속하다’고 했다. 중국 정원의 운치를 잘 드러내는 말이다. 담장을 뚫은 원동문(?洞?)도 격조가 있다.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역시 둥근 모양이 보기 좋다. 문을 지나니 연못과 가산(假山)이 나타난다. 중국 정원의 특징이 잘 드러난 형태로 태호에서 가져온 석조로 자그마한 산을 조성한다. 지그재그로 오르내릴 수 있는 산길을 만들었다. 외부 활동이 적은 여성에게는 운동과 소일의 공간이었다. 개원의 사계절 가산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계절마다 다 갈 수 없으니 안타깝다. 9월의 개원 가산과 연못 풍광도 단아하다.

양저우의 문화 거리 동관가. ⓒ최종명

양저우의 문화 거리 동관가. ⓒ최종명


양저우의 동관의 야경. ⓒ최종명

양저우의 동관의 야경. ⓒ최종명

개원을 나서면 문화 거리인 동관가(??街)로 이어진다. 양저우에서 가장 번화하고 상업이 발달한 동네였다. 온갖 물산이 거래되고 점포마다 전성기이던 시절이 있었다. 동서로 1km가 넘는 거리에 식당과 공예품 가게, 객잔이 즐비하다. 옛날 명인의 고거가 골목 하나씩 차지할 정도인 부자 동네였다. 수십 가구가 몰려 있는데 무료로 개방하거나 입장료를 받기도 한다. 양저우 지방 건축이나 인물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객잔이나 고급 식당으로 개조해 운영하기도 한다. 어둠이 내리니 조명과 홍등이 켜진다. 동쪽 끝 관문도 조명을 밝히니 오가는 사람들 실루엣이 진하게 드러난다. 송나라 시대부터 성루였던 자리다.

양저우의 동관의 야경. ⓒ최종명

양저우의 동관의 야경. ⓒ최종명


양저우의 동관의 야경. ⓒ최종명

양저우의 동관의 야경. ⓒ최종명

동관 밖에 수로가 있다. 항저우에서 시작해 쑤저우, 양저우, 쉬저우, 더저우, 텐진을 거쳐 베이징의 퉁저우에 이르는 경항대운하(京杭大?河)다. 남방의 풍부한 물산을 수도로 옮기는 교통로다. 약 1,800㎞에 이르는 수로다. 남쪽부터 전당강, 장강, 회하, 황하, 해하의 수계를 관통하며 강산이 만들어낸 수많은 호수를 이용한다. 지금도 화물 운송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운하 유람이라는 여행 상품도 있다. 동관고도(??古渡)에서 출발해 약 1시간 운행한다. 야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온종일 발품으로 다닌 양저우의 역사문화가 흐르고 있는 듯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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