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라는 대명사가 설명하는 것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그녀'라는 대명사가 설명하는 것

입력
2020.12.25 15:00
수정
2020.12.25 17:47
0 0

©게티이미지뱅크


'그'는 주로 남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지만, 본래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용되는 대명사였다. 그녀는 영어의 She나 일본어의 かのじょ(가노죠)를 번역하기 위해 개발된 단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야기할 때 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녀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다. 혹시 누군가를 가리킬 때 그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가 있으면 '그 여자'라고 부르겠지. 보통은 '걔'나 '그 사람'을 쓸 테고.

나는 그녀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색함 때문이었다. 사실 일상적인 한국어 회화에서는 '그'라는 인칭대명사도 잘 쓰이지 않는데, '그녀'라는 아예 안 쓰이는 대명사를 굳이 글에 집어넣고 싶지 않았다. 인물의 성별을 굳이 대명사로 부각시키지 않음으로써 서술 자체에서 재미있는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독자들은 뭉뚱그린 대명사를 보고 인물의 성별을 나름대로 짐작하기 시작했다. 독자들의 정신은 충분히 유연했기에, 성별 정도의 세부사항은 없어도 상상을 구축하는 데 아무 문제 없었다. 또 내가 쓰면서 가정했던 성별과 독자가 생각하는 성별이 다를 때 내 속의 편견을 검토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상상했을 세계의 모습을 내가 본래 떠올렸던 세계와 비교하는 건 각별히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실험을 좀 더 확장해서, 인물을 짤 때 성별을 아예 지정하지 않기로 해 보았다. 그 어떤 소재를 다루든 인물의 성별을 반드시 지정해 두어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도 했다. 나는 소설을 다 쓴 다음 성별을 무작위로 지정했다. 파이썬 랜덤(random) 모듈의 도움을 받았다.

그 결과로 '감정을 감정하기'의 주인공 예슬은 조연 소정과 레즈비언 커플이 되었다. 나는 성애적 관계를 묘사하는 걸 상당히 거북스러워 하지만 이성애자 커플은 이전에 몇 번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레즈비언 커플은 내 인식과 경험의 경계 밖에 있었다. 나는 의사난수의 신을 거역하고 이성애자 커플로 바꿀까 며칠을 고민하다 그냥 냈다.

다행스럽게도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본래 성별을 간주하지 않고 썼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보통으로 여겨지는 낭만적 관계의 양상을 거의 그대로 따랐는데, 사람들은 동성애 관계가 어떤 특별한 점 없이 무덤덤하게 묘사되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감정을 감정하기'는 50년 후의 미래를 다루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묘사가 미래적이라고 했다. 나는 한숨을 돌렸다.

꽤 안심했지만서도, 이 방법론도 완전하지 않다. 이렇게 디테일을 뭉개는 전략은 편견을 분쇄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역시 어떤 정체성만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삶의 모양을 묘사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녀'의 사용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쓰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맥락 속에서 그녀는 상당히 전복적인 의미를 띨 수 있다. 예를 들면 오직 남성만이 종사한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가진 등장인물이 여성이라면 거기서 사용되는 대명사 '그녀'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시리즈에서는 모든 대명사가 그 대신 그녀만 사용된다.

무엇이 완벽히 올바른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완벽하게 올바른 방법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지 의심스럽지만, 이런 시도들이 모여서 어떤 이상을 가리키기는 한다고 믿는다.



심너울 SF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2030 세상보기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