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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충약 먹고 샛노란 하늘 본 적 있어?

입력
2020.12.27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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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말이면 SNS에서 연식인증 놀이가 유행이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일 법한 사건 한두 가지를 자랑(?)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얘들아, 극장이나 버스 안에서 담배 피워봤어?" "얘들아, 너희들, 가슴에 색동 수건 달고 운동장에서 조회 서 봤어?" 나도 주변에서 연식이 어지간한 터라 "얘들아, 난 태어났더니 대통령이 이승만이더라." 같은 댓글로 친구들의 '야코'를 죽이며 즐거워한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미있었던 글은 "얘들아, 너희 회충약 먹고 하루종일 샛노란 하늘 본 적 있어?"였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다. 학교에서 채변검사를 하고 나면 결과에 따라 회충약을 나눠주는데 그 이름이 '산토닌'이었다. 빈속에 먹어야 하는 약이라, 우리는 아침을 굶고 등교했다. 그런데 약을 먹고 나면, 약기운 탓인지 공복 탓인지, 온종일 머리가 어지럽고 하늘이 노랗게 보인 것이다. 사실,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환각 증세가 그런 느낌일까? 그렇게 약에 취하고 난 뒤 우리는 "쥐약을 먹고 뛰어보자, 팔딱! 하늘이 노오랗게 보인다." 같이 섬뜩한(?) 노래도 목청껏 불러댔다.

무지막지한 시절이었다. 퇴비는 부숙 과정도 없이 화장실 대변을 퍼붓고 채소 따위는 씻는 둥 마는 둥 우걱우걱 씹어 먹었으니 배 속에 기생충이 없다면 더 이상했으리라. 얼마 전 공동경비구역(JSA)를 넘은 북한 병사 배 속에 기생충이 많았던 것도 그 탓이겠지만, 기록을 찾아보니 1960년경, 회충 수천 마리가 소장을 막는 바람에 아홉 살 소녀가 숨을 거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기억은 늘 그렇게 비위생적이었던 듯싶다. 그때는 왜 그렇게 온종일 아이들 코마다 누런 콧농이 매달리고 손등은 왜 그렇게 쉽게 부르트고 갈라졌을까? 겨울이면, 우리 어린 6남매는 매일 밤,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내복을 벗고 손톱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이와 서캐를 잡았다. 산토닌과 더불어 머리에 몸에 그 독하다는 DDT를 뿌려댄 것도 그 무지막지한 시절의 일이다.

그 후 50여년이 지났다. 이제는 누구도 이, 서캐는 물론, 기생충 걱정도 하지 않는다. 몇 해 전 이가 다시 나타났다며 떠들썩했지만 단발성 에피소드로 끝이 났다. 채소는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키우고 신선상품은 비닐로 깨끗하게 포장해 팔고 있다. 냉장고라는 신기술 덕분에 기생충 범벅의 음식을 먹을 우려도 크게 줄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깨끗해지는 동안 세상은 쓰레기장이 되고 자연은 병들어 갔다.

팬데믹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수많은 고통과 죽음, 사람들은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저주라며 온갖 각오들을 쏟아낸다. 비닐과 일회용품, 육류 소비를 줄이자. 환경을 우선하는 소비를 하자. 새해 2021년은 팬데믹에서 벗어나는 원년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내 마음속에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더 심으면,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할까? 내가 아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50년 후, 개구리 무섭다며 아빠 농막에도 가지 않으려는 딸에게도, 오늘 나처럼, 우리처럼 이 부질없는 연식인증 놀이를 할 기회가 있을까? "얘들아, 너네, 비닐, 플라스틱이 무슨 말인지 아니? 우리에게도 그렇게 무지막지한 시절이 있었단다."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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