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선작 '티니안에서'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소설 당선작 '티니안에서'

입력
2021.01.01 04:30
0 0

삽화=신동준 기자


그해 여름 사이판 국제공항에 도착한 수혜와 나는 국제선 터미널 끝에 자리한 경비행기 탑승 대기실에서 우연히 두 명의 미국인 남자와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젊은 백인으로, 한 명은 노란빛이 도는 갈색 눈에 골격이 크고 오른쪽 팔이 온통 문신으로 뒤덮여있었다. 다른 한 명은 짧게 자른 잿빛 머리에 헐렁한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한쪽 귀에 십자가 모양 금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대기실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신호를 보냈다. 캐리어를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두 남자의 장난기 어린 눈빛에서 한계에 다다른 육식 동물의 허기가 느껴졌다.

대기실에 사람이라곤 우리 넷뿐이어서 수혜와 나는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말을 섞었다. 대화 중에 나는 조금 당황했는데 수혜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형편없는 영어로 자세히 털어놨기 때문이다. 자신과 내가 중학교 시절 친구라는 것, 우리가 10년 가까이 서로 안부를 모르고 지내다 최근에야 다시 연락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이 여행은 우리의 관계 회복을 위한 일종의 ‘우정 여행’이며 자신과 달리 직장이 있는 나의 사정을 고려해 3박 4일의 짧은 일정을 계획했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자신의 ‘보이프렌드’가 사이판에서 가까운 티니안 섬의 존재를 알려주었다는 것 등등. 솔직한 동시에 적극적인 그녀의 태도에 남자들은 한껏 고무된 눈치였다. 내가 활주로에 늘어선 경비행기들을 바라보며 이러다 그들과 한 비행기를 타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하고 있을 때 남자들이 이름을 밝히며 악수를 청해왔다. 문신한 남자의 이름은 제임스, 십자가 귀걸이의 이름은 제레미였다. 어쩌면 그 반대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팻맨이라고 불러요. 사이판에서만 쓰는 이름이죠.”

문신한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십자가 귀걸이가 “전 리틀보이예요.” 라며 따라 웃었다. 마치 자기들끼리만 아는 농담이라는 투였다. 수혜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학창 시절 음악실에서 비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자주 짓던 표정이었다. 리틀보이가 한손으로 십자가를 만지작대며 우리에게 입바른 칭찬을 늘어놓는 동안 팻맨은 숱 많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유쾌한 비밀이라도 감춘 양 빙글거렸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직원이 다가와 노란 종이를 조가비 모양으로 오려 만든 숫자판을 나누어주었다. 남자들이 받은 숫자는 1과 4, 나와 수혜가 받은 숫자는 2와 3이었다. 경비행기의 무게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나는 앞열에 리틀보이와, 수혜는 뒷열에 팻맨과 나란히 앉았다. 네 사람의 안전벨트를 확인한 기장이 마이크가 달린 헤드셋을 건네며 직업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경비행기가 탈탈거리며 날아올랐다. 리틀보이가 내게 뭐라고 말했지만 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약지로 헤드셋을 가리키며 손을 내젓자 리틀보이가 몇 번 더 대화를 시도하다 이내 포기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섬이 가까워오자 헐겁게 잠긴 문틈으로 습한 바람이 새어들었다. 하강하는 경비행기 창문 너머로 짐꾼들이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티니안 공항은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작았다. 수혜의 이름이 한글로 적힌 종이를 든 중년의 동양 남자가 게이트 너머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혜가 예약해둔 한인 게스트하우스 주인이었다. 우리는 팻맨과 리틀보이에게 허둥지둥 작별 인사를 하고 남자가 몰고 온 소형 밴에 올라탔다.

“저놈들 조심하세요.”

남자가 말했다.

“눈이 탁 풀린 게 아무리 봐도 약 빠는 놈들 같아.”

그가 백미러를 흘끔대며 선심 쓰듯 덧붙였다.

“렌터카에 스노클링 장비 넣어놨어요. 이 동네에는 라이프 가드 같은 거 없으니까 알아서들 조심하시고.”

해변 앞 도로에 면한 게스트하우스는 두 층짜리 주택을 개조한 건물로, 쇠락한 관광지 숙소의 외용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본래 상아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외벽은 칠이 벗겨져 처음 빛깔을 잃은 지 오래였고 자갈이 깔린 마당에는 지저분한 자전거와 빈병, 목이 꺾인 파라솔 따위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장점이라면 숙박 시 렌터카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체크인을 마친 우리는 숙소에서 빌린 빨간 도요타를 타고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휴가철인데도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보조석에 앉은 나는 체크인 카운터에서 얻은 지도를 펼친 뒤 수혜에게 가까운 해변을 일러 주었다. 수혜는 그러지 말고 일단 섬을 한 바퀴 둘러본 뒤 어디로 갈지 정하자고 했다. 도로변에는 불꽃나무라 불리는 플레임 트리가 듬성듬성 늘어서있었다. 약한 바람에도 새빨간 꽃잎을 풀풀 날리는, 아름답지만 헤픈 나무였다.

티니안은 작은 섬이었다. 숙소가 있는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차로 한 시간이면 넉넉히 왕복할 수 있었다. 무료하게 섬을 돌아보고 해변으로 가려는데 반대편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보였다. 우리와 똑같은 빨간색 도요타였다. 팻맨과 리틀보이가 창밖으로 목을 쭉 빼고 손을 흔들었다. 수혜가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들도 천천히 멈춰 섰다.

두 대의 도요타는 결국 한 대로 정리됐다. 다음날 우리는 지도에 붉은 점으로 표시된 장소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리틀보이가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텅 빈 도로를 달리다 표지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샛길로 빠지기를 반복했다.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티니안에는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본, 그 틈에 희생된 한국인들의 자취가 울타리도 없이 폐허 상태로 흩어져있었다. ‘cemetery’라고 적힌 표지판을 따라 들어갔더니 정말로 잡초만 무성한 묘지가 나오는 식이었다. ‘fuel drum storage’라는 표지판을 따라가자 드럼통으로 가득한 연료저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벙커 바닥에는 휘어진 철근이며 탄피 조각들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이제 막 폭격 당한 듯 생생하게 보존된 현장에 팻맨과 리틀보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호기심에 숲길로 들어섰다가 무서울 정도로 말짱한 탄약고를 발견하기도 했다. 수풀이 우거진 밀림에서 탄약고를 발견한 팻맨이 윗옷을 가슴 위로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리틀보이와 팻맨이 운전을 교대하려는데 수혜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도를 보니 때마침 근처에 도서관이 있었다. 섬에 하나뿐인 작은 도서관이었다. 나는 남자들과 남겨지는 것이 불편해 수혜를 따라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열람실은 에어컨이 틀어져있어 무척 시원했다. 수혜를 기다리는 동안 건성으로 책장을 훑다가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책들 사이에서 장정이 아름다운 도감 한 권을 찾아냈다. 페이지마다 세밀한 삽화를 곁들인 산호초 도감이었다. 인기척이 나 돌아보니 수혜가 내 어깨 너머로 책을 훔쳐보고 있었다.

“대박. 존나 예뻐.”

수혜가 큰 소리로 감탄하자 입구에 앉은 뚱뚱한 원주민 여자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둘이 밖으로 나오는데 수혜가 잠깐만, 하고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잠시 후 불룩해진 배를 끌어안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티셔츠 안에 숨긴 도감을 꺼내 내게 선물했다. 사태를 파악한 팻맨과 리틀보이가 수혜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섬 북부에는 미국이 맨해튼 프로젝트의 거점으로 사용했던 활주로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노스필드’라 불리는, 4열로 뻗은 거대한 활주로였다.

“일본군이 지었지만, 우리가 썼지.”

리틀보이가 말하며 키득거렸다. 활주로 북쪽에는 유리 온실처럼 생긴 두 개의 원자폭탄 탑재소가 있었다. 안내문이 영어로 되어있어, 들고 있던 지도 귀퉁이에 한글로 적힌 설명글을 살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리틀보이와 팻맨을 보관했던 장소’라고 쓰여 있었다. 수혜에게 사실을 말해주자 그녀가 남자들의 농담을 눈치 채고 눈을 흘겼다. 팻맨이 어깨를 으쓱하며 수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일본 놈들은 당해도 싸지.”

팻맨이 말했다.

“우리 아빠 같은 소릴 하네.”

수혜가 말했다.

“슬슬 해변에나 가볼까.”

리틀보이가 말했다.

티니안의 해변은 놀랄 만큼 한산했다. 수심이 얕아 관광객이 붐비는 숙소 앞 해변과 몇몇 다이빙 포인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해변은 사람 그림자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굳이 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누드비치를 고집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인기척을 느낄 수 있어서였을 것이다.

수혜가 비키니 상의를 벗고 비치타월 위에 엎드렸다. 깜짝 놀란 나와 달리 남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수혜와 조금 떨어진 야자수 그늘 아래 수건을 깔고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남자들 앞에서 아무렇게나 옷을 벗는 수혜가 불편했다. 수영 팬츠를 입은 리틀보이가 내게 다가오더니 가슴이 조금 작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쁜 뜻으로 듣지 마요.” 그가 말했다. “동양 여자들은 그게 매력이에요. 가슴이 작으면 소년(little boy)처럼 보이거든요.”

리틀보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딴에는 꽤나 기발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움츠렸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팻맨이 자리로 돌아오며 수혜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수혜가 보란 듯이 몸을 발랑 뒤집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납작한 수혜의 가슴이 거의 평평해졌다. 그 모습을 본 팻맨과 리틀보이가 마주보며 씩 웃었다. 순간 열대성 소나기가 예고도 없이 쏴쏴 쏟아졌다. 나는 수건을 머리에 덮어 쓰고 차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다. 돌아보니 수혜가 남자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느긋하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우리는 인적 없는 도로를 따라 섬 남쪽에 있는 자살 절벽으로 향했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군과 강제 징용된 한인 수백 명이 미국에 항복하길 거부하고 뛰어내린 곳이었다. 도착해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절벽이 아니라 절벽으로 이어지는 너른 들판이었다. 바다를 에두른 들판 곳곳에 일본군의 희생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었다.

들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서로의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무결한 어둠이었다. 우리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위령비와 야자수 사이를 산책하듯 걸어 다녔다. 설탕처럼 뿌려진 별들 사이로 은하수가 고요히 흘러갔다. 수혜가 기념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우리는 타이머를 맞춘 휴대폰 카메라를 바위 위에 걸치고 절벽 끄트머리에 섰다. 렌즈와 거리를 두려 뒷걸음치다 하마터면 다 같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씨발 여기서 뒤지면 자살인 줄 알 거 아냐.”

수혜가 나만 들으라는 듯 한국어로 깔깔거렸다.

플래시가 터지자 주변에 있던 위령비들이 일제히 은색으로 번쩍였다. 사진을 확인해보니 두 남자가 수혜의 양 볼을 꼬집고 있었다. 수혜의 익살맞은 얼굴이 더 귀여워보였다.

*

완전무결한 어둠 속에서 나는 음악실의 친구들을 생각했다.

내가 다닌 중학교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음악실이 하나 있었다. 학급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생긴 여분의 공간이었겠으나 자세한 정황은 모른다. 한 가지, 머리핀으로 자물쇠를 딸 수 있어 우리가 그곳을 쉽게 드나들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수혜, 연선, 나. 각자 반이 달랐던 우리는 음악실에서 자주 함께였고 교실에서 제각각 외톨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세 통의 도시락을 나눠 먹고 한 권의 교환 일기장을 주고받았다. 걸레 삼총사. 아이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엄마는 지금도 이따금 내게 말한다.

“그때는 네가 얼마나 힘든지 몰랐어. 알다시피 나도 여유가 없었잖니.”

나는 지금도 이따금 엄마에게 말한다. 방과 후 나를 때리고 괴롭혔던 아이들에 대해,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잠그던 습관에 대해, 당신에게 너무 자주 화를 냈던 이유에 대해.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라고, 내게도 문제는 있었다고, 다만 그때는 내 모든 진심이 유리병에 든 편지처럼 느껴졌다고, 나이든 자식이 유년기에 저지른 비행을 털어놓듯 약간의 유머를 곁들여 이야기한다. 그때 나와 함께 따돌림 당했던 아이들, 폭력을 피해 음악실로 모여든 두 친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시 우리가 성욕으로 충만했다는 것,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그 성욕에 충실했다는 것, 각자의 경험담을 남몰래 공유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그 시절 우리에게 붙은 모욕적인 별명을 말해야 하고,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음악실 낙서 사건 - 누군가가 벽에 우리 별명을 매직펜으로 휘갈긴 - 에 대해서도 말해야하고, 우리를 제외한 동급생 전부가 돌아가면서 사포로 낙서를 지웠다는 사실도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제법 많은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말을 가렸고 내편이 아닌 속마음을 끝내 숨기지 못했으며 나와 어긋나는 순간 그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폭력적인 언사를 정당화했다.

엄마는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견뎌낼 만큼 맷집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전말을 알고 나면 그녀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열렬히 더듬고 수정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오답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 엄마는 전처럼 강하지 않다. 그녀는 이제 나를 사랑하기만도 벅차다. 나 또한 그렇다.

*

옆방에 있던 손님들이 떠나는지 문밖에서 캐리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덕분에 일찍 눈을 뜬 나는 천장에서 느긋하게 공기를 휘젓는 실링팬을 바라보며 지난 이틀을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맨가슴으로 비치타월 위에 엎드린 수혜, 검은 실루엣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리틀보이, 들판에 유령처럼 솟은 위령비들…….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잦아드는 수혜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을 통과한 빛이 수혜의 어깨를 타고 이불 아래로 흘러내렸다. 수혜의 돌아선 등에서 희미한 적의가 느껴졌다. 나와 수혜 사이에 놓인 탁자 위에 수혜가 준 산호초 도감이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금박으로 제목을 박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표지였다.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책을 집었다. 읽어보려 했으나 모르는 영단어가 너무 많았다. 수혜와 등을 지고 모로 누운 나는 휴대폰으로 산호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관련 내용이 있는 블로그를 검색하다가 산호초에 의존해 살아가는 바다생물을 정리한 포스트를 발견하고 한참 읽었다. 산호초 틈에 몸을 숨기고 먹잇감을 사냥하는 곰치, 자신이 먹은 산호초의 독성으로 적을 공격하는 갯민숭달팽이, 산호초를 못살게 구는 해삼과 산호살이조개, 산호초 지역을 황폐하게 만드는 가시왕관불가사리…….

그래. 오늘은 산호초를 보러 가자.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차 트렁크에 스노클링 장비가 있는지, 있다면 쓸 만한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양 남자 두 명이 마당에서 차에 실린 알루미늄 상자들을 부지런히 바닥으로 내리고 있었다. 래시가드를 입고 능숙하게 장비를 옮기는 모습이 꼭 해변의 안전요원 같았다.

“안녕하세요!”

그들 중 한 명이 장갑을 벗으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기르는 개가 기둥에 목줄이 묶인 채 컹컹 짖어댔다. 남자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무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두건을 이마에 동여맨 모습에서 베테랑 여행자다운 자신감이 묻어났다. 또 다른 남자 역시 목 인사를 건넸으나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내가 무테안경과 대화하는 동안 그는 바닥에 놓인 장비들을 빠르게 숙소로 날랐다. 낯선 사람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건 어디까지나 무테안경의 역할인 듯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원자폭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중이었다. 티니안에 사는 한인과 그 자손들의 사연을 영상으로 담을 예정이라고 했다. 무테안경이 내게 혼자냐고 물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왔으며 오늘은 둘이 스노클링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여, 굿모닝.”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이었다.

“같이 온 친구는 어제 들어왔고?”

“아, 그럼요.”

“아, 그럼요.” 그가 내 말을 따라하며 비아냥거렸다.

“친해요?”

“네?”

“친하냐고, 그 친구랑.”

그가 다가오자 쉰내가 훅 끼쳤다. 핀업걸이 그려진 그의 셔츠 가슴팍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주인을 본 개가 목줄이 있다는 걸 잊은 듯, 제자리에서 풀쩍 뛰어올랐다.

“친구 분이 되게 자유로운 영혼이신가보네.”

그가 말했다.

“걔들 약 하죠?”

“누구요?”

“그 미국 놈들.”

“모르겠는데요.”

“아니 다른 건 아니고 해변에서 약 빨다 걸릴까봐. 여기 경찰들이 다른 건 몰라도 떨 냄새 하나는 귀신 같이 잡아내거든.”

그때 귀에 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수혜가 아까 본 남자들과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가씨들 노는 건 내 알 바 아닌데.”

그가 수혜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래도 조심 좀 해주면 좋겠네. 그러다 사고 나면 섬 이미지만 안 좋아져. 괜히 여행 카페 같은 데서 말 돌면 한국 여자들 몸 사리느라 안 온다구. 무슨 말인지 알죠?”

흰 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열대새 한 마리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다가 바람에 휩쓸려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태풍이 올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빨간 도요타가 곧게 뻗은 활주로를 덜컹덜컹 내달렸다. 뒷좌석에 앉은 팻맨과 수혜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수혜의 웃음소리가 기다란 탐침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면허를 따고 처음 하는 운전이었지만 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노스필드를 보자 두려운 마음이 사라졌다. 왼쪽으로 핸들을 휙 돌리자 수혜와 팻맨의 몸이 오른쪽으로 와르르 쏠렸다. 보조석에 앉은 리틀보이가 뒷좌석에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쏟아냈다. 흥분한 나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크게 꺾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혜가 팻맨의 허벅지 위로 무너지듯 엎어졌다. 나는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퀴가 돌무더기 위를 지날 때마다 수혜의 몸이 공중에 번쩍 들렸다가 떨어졌다. 팻맨이 롤러코스터를 탄 꼬마처럼 괴성을 지르며 나를 부추겼다. 리틀보이가 의외라는 듯 나를 곁눈질했다.

활주로 북쪽 원자폭탄 탑재소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뒤편에 눈에 익은 올리브색 지프가 세워져있었다. 아침에 본 남자들이었다. 각각 카메라와 조명을 든 두 남자가 취재원으로 보이는 노인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를 알아본 무테안경이 멀리서 고갯짓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차창을 내리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어 틀렸네.” 선글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운전하시는 거 보고 저희끼리 그랬거든요, 저거 분명 수혜씨일 거라고.”

“취재 중이신가 봐요.”

“네. 여기가 알고 보면 되게 재밌는 곳이에요.” 선글라스가 말했다. 수혜가 창턱에 팔을 괴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선글라스가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 말씀이, 산호를 빻아 다져 만든 거래요. 이 비행장이요.”

차에서 내린 팻맨과 리틀보이가 무테안경과 노인 근처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는 인터뷰 중인 노인이 일본이 활주로를 만들 때 동원됐던 한국인 노역자 중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노스필드는 본래 일본이 미국을 공습하려고 만든 비행장인데요. 나중에는 반대로 미군이 일본에 핵폭탄을 던지는 기지로 썼대요. 일본의 공습 기지였던 곳이 훗날 리틀보이와 팻맨을 탑재한 에놀라 게이의 이륙장으로 쓰인 거죠. 그러고 보면 역사란 참 거대한 아이러니의 텍스타일인 것 같아요.”

선글라스가 쾌활하게 말했다.

“저 밥맛은 뭐래.”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수혜가 내게 속삭였다. 나는 팻맨과 리틀보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선글라스와 대화를 이어갔다. 두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무테안경 주변을 기웃대고 있었다. 뭔가 시빗거리를 찾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무테안경은 그들의 존재를 깨끗이 무시했다.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보였다. 나는 수혜가 제발 남자들을 부르지 않기를, 그들의 별명을 입에 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팻맨과 리틀보이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일이 싱겁게 돌아간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 올려보였다.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를 돌려 나가는 길에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축 처진 눈꺼풀에 반쯤 덮인 눈동자가 물에 갠 먹처럼 일렁였다.

우리는 섬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를 타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목적지인 신사에 도착하기까지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후로 넘어서며 바람이 한층 거세졌다. 신사 입구에 우거진 플레임 트리에서 주먹만 한 꽃들이 투두둑 떨어졌다. 해질녘 스노클링을 하려던 계획은 접어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싱그러운 숲 냄새를 만끽하며 본당으로 올라갔다. 양손에 조리를 들고 맨발로 계단을 오르는 수혜의 뒷모습이 어쩐지 고집스러워 보였다. 본당 양편에 선 동물 모양 석상에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다. 하늘을 가린 나뭇잎들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부드럽게 내리꽂혔다. 꽃잎과 이끼로 울긋불긋한 땅이 빛에 반사되어 황금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 비치타월 세 장을 겹쳐 깐 뒤 숙소 앞에서 산 피자를 꺼냈다. 팻맨과 리틀보이가 아침부터 한 조각씩 먹어치운 바람에 피자는 이 빠진 동그라미가 되어있었다. 어느덧 운전자가 된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미지근한 맥주 캔을 땄다. 분위기 탓에 쉽게 취기가 오른 셋은 황당한 장난을 생각해냈다. 수혜와 팻맨이 상의를 벗고 본당 아래 누워 있다가 방문객이 오면 깜짝 놀라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모두의 들뜬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럼 나는 나무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십 분쯤 지나자 승용차 두 대가 신사를 향해 다가왔다. 수혜가 재빨리 비키니 끈을 풀고 본당 아래 드러누웠다. 수혜 옆에 누운 팻맨이 바지까지 벗는 시늉을 하며 낄낄거렸다. 리틀보이와 나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두 대의 승용차에서 예닐곱 명의 동양인들이 법석을 떨며 밖으로 나왔다. 말소리를 들으니 중국인이었고 연령대가 다양한 걸로 보아 친인척 지간인 듯했다. 그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수혜와 팻맨을 발견하고 곁에 있던 남자를 툭 쳤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수혜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자 남자가 몸을 빼고 본당 쪽을 살피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 중에는 열 살쯤 돼 보이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짧은 실랑이 끝에 가족들을 다시 차에 태웠다. 유쾌한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고 차가운 경멸만이 남았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리틀보이와 나는 휴대폰을 든 손을 내리며 실망스런 눈빛을 주고받았다. 십대로 보이는 중국인 남자애들 몇 명이 딴청을 피우며 마지막까지 본당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

그 시절 나를 지배했던 욕구는 잦아든 지 오래다. 뭐랄까, 마치 도시를 통째로 쓸어버리고 깊은 잠에 빠진 휴화산 같다. 이제 나는 남들이 웃으면 같이 웃음을 터트리고 남들이 심각해하면 함께 미간을 찌푸린다. 야생에 던져진 초식동물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포식자들의 기분을 살핀다. 이런 내 태도가 필요 이상으로 방어적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수혜가 필요 이상으로 낙천적이라는 것도.

그 모욕적인 낙서 사건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었다. 연선이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나쁜 일을 당하거나 충동적으로 가출한 것이 아니었다. 증발. 그건 말 그대로 증발이었고 경찰은 조사 끝에 자발적 실종으로 결론 내렸다. 조사 과정에서 수혜와 나는 많은 질문을 받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물었다. 연선이가 사라진 날 무얼 하고 있었는지, 음악실에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셋이 어쩌다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물었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많지 않았다.

졸업 후 9년 만에 수혜가 연락해왔을 때 나는 말하고 싶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연선이가 사라진 것은 우리 탓이 아니라고.

*

바다가 노을빛을 받아 오렌지색으로 반짝였다. 나는 스노클링 마스크를 입에 대고 시험 삼아 숨을 크게 내쉬었다. 수혜가 수건으로 누울 자리를 만들며 자기는 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며칠 사이 커피색이 된 수혜의 예쁜 몸을 바라보며 나는 팻맨과 리틀보이가 어서 빨리 섬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붉게 출렁이는 바다 속으로 차곡차곡 몸을 담갔다.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할 줄 아는 수영이라곤 아무렇게나 팔을 휘젓는 개헤엄이 전부였다. 티니안에는 안전요원이 없다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말이 생각났다. 마스크를 쓴 얼굴을 물에 살짝 담가보았다. 수심이 얕아서인지 별달리 보이는 게 없었다. 발레리나처럼 발끝으로 바닥을 콩콩 찧어가며 발이 닿는 곳 중 최대한 깊은 지점을 찾았다. 발을 떼자 몸이 둥실 떠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물안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의외로 무척 탁했다. 기대했던 산호초는 보이지 않았다. 미끌미끌한 해초들이 발가락을 휘감았다. 바람 때문에 불규칙한 파랑이 일었다. 나는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 멀리 수혜가 비시시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팻맨과 리틀보이가 양손에 먹을 것을 들고 해변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고꾸라지듯 들어갔다. 두 번째로 물 밖에 나왔을 때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팻맨과 수혜가, 그리고 수혜와 리틀보이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꼬르륵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오래 버텨볼 작정이었다.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셋은 사라지고 없었다.

*

그 시절 나와 함께 잔 남자애들의 이름을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다들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건 그 아이들이었는데. 정작 미워해야할 사람은 그들이었는데.

나와 섹스한 남자애들이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다니는 이유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때리고 못살게 구는 아이들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낙인을 찍어야만했던 여자들의 마음을.

나는 가끔 휴대폰으로 남자들의 SNS 계정을 찾는다. 호기심에 나와 몸을 섞고 훗날 나를 걸레 취급하는 것으로 죄책감을 털어냈던 그들의 안부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이 집요한 탐문은 물론 그들이 좀 불행했으면 좋겠다는 내 인간적인 바람과도 관련이 있다.

*

물 밖으로 나온 나는 휘청거리며 벤치에 앉았다. 사흘간의 여행이 나만 못 알아들은 농담처럼 느껴졌다. 해가 졌는데도 수혜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는 캄캄한 자살 절벽에서 팻맨과 리틀보이가 수혜를 강제로 취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수혜가 팻맨을 있는 힘껏 밀쳐낸다. 리틀보이가 수혜의 배를 걷어찬다. 수혜가 머리핀으로 리틀보이의 눈을 찌른다. 리틀보이가 욕설을 내뱉으며 수혜를 절벽 밖으로 밀어낸다.

머리핀.

너는 담배를 머리핀에 끼워 피우곤 했지. 손에 냄새가 배는 게 싫다면서. 음악실 문을 가장 먼저 연 것도 너였는데. 내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보는 게 분하다면서. 또래들의 눈에 그게 좀 고깝게 보인 걸까. 둘이 아닌 셋이어서 더 싫었던 걸까. 연선이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너는 왜 나를 다시 찾았을까.

*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목이 꺾인 파라솔이 마당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뛰어올라갔지만 객실은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마당 앞 벤치에 앉아 수혜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어디선가 고약한 땀 냄새가 났다.

“걔 아직 안 들어왔어?”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다가오며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아, 네. 오늘은 밖에서 자고 올 모양이에요.”

“허!”

그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씨 골치 아프게 됐네. 그거 알아요? 내가 아가씨들 놀랄까봐 말 안했는데 얼마 전에 여기서 사건 났었어.”

“정말요?”

“정말이지 그럼 내가 없는 말 해? 그때도 기집애들이 밤에 빨가벗고 돌아다니다가 양키놈들한테 걸려가지고 괜히 나까지 불려가서 조사 받고 어휴.”

그때 올리브색 지프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요?” 무테안경이 내게 물었다.

“수혜가 아직 안 들어와서요.”

“어? 수혜씨 아까 자살절벽 쪽으로 가는 거 봤는데.” 무테안경이 말했다.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치. 우리 거기서 나올 때 마주쳤잖아 걔들이랑. 안 그래도 찜찜했거든요. 수혜씨 혼자라.”

“경찰에 신고할까요?” 무테안경이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소란을 감지한 개가 펄쩍펄쩍 뛰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개의 목줄이 묶인 기둥을 발로 차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형님들아. 자기들이랑 나랑 입장이 같아? 막말로 지가 좋아서 따라갔는지 어떻게 알아요.”

“사장님. 그러지 말고 신고하세요. 아무래도 현지인이 해야 처리가 빠르지 않겠어요? 그 새끼들 아무래도 좀…” 무테안경이 말했다. “민지씨도 조심하세요. 이 동네에 동양 여자만 노리는 양키들 많아요.”

곁에 있던 남자가 무테안경을 툭 쳤다. “야. 민지씨는 안 그래.”

그때 하얀 비키니에 비치타월을 두른 수혜가 마당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바다에서 놀았는지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내가 달려가자 수혜가 주먹 쥔 손을 내밀더니 내 손바닥 위에 딱딱하고 까끌까끌한 물체들을 올려놓았다. 새끼손가락만 한 산호 조각들이었다. 수혜가 산호에 달라붙은 모래알갱이들을 검지로 살살 굴리며 감탄했다.

“민지야 이거 봐. 모래가 별모양이야.”

뒤를 돌아보니 세 남자가 태풍에 터전을 잃은 이재민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내 지갑 속에는 오래된 사진이 한 장 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스티커 사진 속에서 연선이는 어찌된 일인지 혼자 사복을 입고 있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호피무늬 블라우스에 짙은 립스틱을 칠하고, 교복을 입은 나와 수혜의 어깨에 씩씩하게 팔을 두르고 있다.

앞으로 음악실에는 가지 않으려 해.

그날 연선이에게 비밀 일기장을 건네받았을 때 나는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혜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에게는 그 시절 비밀 일기장이 없다. 마지막으로 일기장을 주고받은 건 연선이와 수혜니까. 수혜와 다시 만나게 된 후에도 나는 일기장의 행방을 묻지 못했다.

*

수혜와 나는 숫자 1과 2가 적힌 조가비 모양 숫자판을 들고 사이판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경비행기에 올랐다. 수혜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내게 뭐라고 말했다. 내가 엔진 소리 때문에 안 들린다며 손을 내젓자 수혜가 곁으로 다가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수혜와 나의 헤드셋이 달칵 부딪쳤다. 우리는 깜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수혜가 아이처럼 배시시 웃었다. 우리는 또 다시 동시에 몸을 숙였다. 헤드셋이 또 다시 달칵 부딪쳤다. 우리는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헤드셋 탓에 우리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둔하게 들려왔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설정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 대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강보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