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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이란 사람을 처음 본 건 지금은 해체된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 창단식에서였다.
장발의 헤어스타일로 시선을 끌었던 그는 구단주를 맡기엔 너무 젊어 보였다. 게임 업계 외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기에 이력을 찾아보니 당시 만 36세였던 그의 '부'에 한번 놀랐고, 야구에 대한 광적인 애착에 또 한번 놀랐다.
2001년 친구 5명과 게임업체 네오플을 설립한 허민은 2005년 출시한 게임 '던전앤파이터'가 빅 히트를 치면서 돈방석에 앉았다. 2008년엔 네오플을 넥슨에 3,800억원에 매각해 청년 거부(巨富)가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야구선수를 했다는 허민은 홀연히 미국 버클리 음대로 유학을 떠나 너클볼의 대가, 필 니크로의 제자가 돼 너클볼을 전수 받기도 했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의 꿈은 야구단을 갖는 것이었다. 고(故) 하일성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에 따르면 2007년 경영난으로 매각을 결정한 프로야구단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겠다고 당돌하게 찾아온 젊은이가 바로 허민이었다. 연간 약 300억원이 투입되는 프로야구단 운영을 위해 강남 한복판에 있는 3,000억원대 초대형 빌딩 매입을 고민했다고 한다. 직접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보겠다며 KBO 드래프트 신청까지 할 정도로 야구가 그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허민을 잘 아는 야구인은 "술도, 여자도 멀리하고 오직 사업과 야구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비뚤어진 야구사랑은 2018년 말 히어로즈(Heros) 구단의 이사회 의장이 된 뒤 폭정으로 변질됐다.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2군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불러 직접 공을 던지는 상식 밖 행동으로 야구인들의 공분을 샀다. 심지어 이 일이 언론에 노출되자 배후를 캐내기 위해 팀내 간판 선수였던 이택근을 통해 '팬 사찰'을 지시했다는 논란이 최근 불거지면서 야구계가 발칵 뒤집혔다.
허민과 함께 회자되는 인물은 김택진 NC 다이노스(Dinos) 구단주다. 김 구단주도 게임(리니지)으로 성공한 청년 재벌 출신이며 고(故) 최동원을 좋아했다는 '베이스볼 키즈'다. 김 구단주를 처음 본 것도 2011년 NC의 창단식에서였다. '거인의 별'이라는 야구 만화를 보고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 모래주머니를 다리와 팔에 차고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 매일 커브를 연마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그에게서 순박한 열정을 느꼈다. 청소년들을 모두 컴퓨터 앞에 앉혀 놓았던 그는 땀과 눈물, 환희와 절망이 교차되는 현실의 그라운드로 돌려보내겠다는 말로 사회 환원을 약속해 박수를 받았다.
구단주가 되고 나서 한번도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묵묵히 지원하기를 9년, 올해 NC를 창단 첫 정규시즌ㆍ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에 올려 놓은 뒤 "만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감격했다. 우승 주역 양의지는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택진이형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감히 선수가 구단주에게 던진 이 호칭 하나로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시 말하지만 허민과 김택진은 야구를 좋아한 재벌이다. 하지만 대하는 방식이 달랐다. 게임과 현실의 야구를 구분한 사람, 현실마저 야구 게임으로 착각한 사람의 차이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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