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명 대학살...일제 만행 고발하며 '중화제국'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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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명 대학살...일제 만행 고발하며 '중화제국'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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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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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장쑤성 ①난징 대학살기념관·부자묘·중산릉

난징대학살기념관의 일본군 학살 장면을 그린 그림. ⓒ최종명

장쑤성은 아름다운 자연과 풍성한 문화유산을 지닌 곳이다. 일본군이 자행한 대학살의 현장과 쑨원의 묘역이 있는 난징, 황제가 다녀간 호수와 최치원의 흔적이 있는 양저우, 물 위의 유채 바다를 품은 싱화, 삼국지와 수호지 촬영세트장의 우시, 세계문화유산 정원이 있는 쑤저우, 수향인 쿤산까지 5편으로 나눠 발품 기행을 떠난다.

6주에 30만명 희생...난징대학살은 진시황의 저주인가?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침공해 점령했다. 눈과 귀, 입으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듬해 1월까지 6주 동안 무려 3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두고 한국은 난징대학살, 중국은 난징다투사(南京大屠殺), 일본은 난징즈껜(なんきんじけん)이라 표현한다. ‘대학살’ ‘대도살’ ‘사건’으로 달리 부르는 만큼 세 나라 간 인식의 간극이 크다. 난징은 당시 중국의 수도였다.

난징대학살기념관 입구의 조형물. ⓒ최종명


난징대학살기념관 내부 모습. ⓒ최종명

난징대학살기념관의 공식 명칭은 침화일군난징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日?南京大屠?遇?同胞?念?)이다. 대학살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난징 시내를 관통하는 장강의 오른쪽, 명나라 고궁 외성의 성문 중 하나인 강동문 부근에 있다. 전체 10만㎡ 규모의 기념관에 시민 광장과 자료 전시관이 있다. 무료로 개방한다.

난징대학살기념관 내부. 학살을 증언하는 무덤을 전시하고 있다. ⓒ최종명


난징대학살기념관의 추모 장식. '잊지 말자, 국치'라는 의미다. ⓒ최종명


난징대학살기념관의 허핑 조형물이 멀리 보인다. ⓒ최종명

전시관 안에는 대량 학살 무덤인 만인갱(万人坑)도 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특히 어린아이와 여성에 대한 학살과 강간 만행은 인간에 대한 혐오까지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증거와 현장이 있으나 일본은 여전히 반성과 사과가 없다.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설명이 이어진다. ‘잊지 말자 국치(勿忘??)’ 4글자로 호소한다. 이어지는 4글자는 ‘진흥중화(振?中?)’다.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와 제국으로의 추구가 함께 있으니 모골송연(毛骨悚然)이다. 당시 모습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광장에 세워져 있다. 어린아이를 안고 비둘기를 든 허핑(和平) 조각상이 보인다. 아무리 평화를 기원해도 지나버린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영화로 제작해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난징대학살을 고발한 영화 ‘난징! 난징!’ 포스터.

2009년에 개봉된 영화 ‘난징! 난징!’이 생각난다. 흑백 화면에 펼쳐지는 ‘난징대학살’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스타인 류예, 가오위엔위엔, 장이옌 등이 모두 죽는다. 용감하게 저항하고, 주민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능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며, 여성들을 구하려고 스스로 위안부를 자청하며 온몸이 벗긴 채 살해된다. 고뇌하던 일본군은 자살하고 어린 병사는 무차별 총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기도 한다. 화면은 죽음을 의미하는 선혈이 낭자하다. 이 모두의 죽음을 아름답게 그려낸 감독은 루촨이다. 젊은 6세대 영화감독으로 국수주의의 낭떠러지에 빠지기 쉬운 주제를 건조한 화면 위에 30만명의 희생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의 조형물. ⓒ최종명

난징은 기원전에 금릉(金陵)이라 불렸다. 오나라와 월나라를 거쳐 초나라 땅이었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이 왔다. 동남쪽의 방산(方山)에 오르니 한 마리 용이 휘감고 있는 형상이었다. 풍수지리를 안다는 사람이 천자가 나올 기세가 보인다고 했다. 산 곳곳에 나무를 박아 용맥(??)을 뚫어 불온한 기운을 원천봉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삼국시대의 오와 동진, 남조 시대의 네 왕조는 대부분 단명했다. 명나라는 난징에 응천부(?天府)를 설치하고 수도로 삼았다가 순천부(?天府)인 지금의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276년 간 왕조를 유지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은 천경(天京)이라 고치고 수도로 삼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신해혁명 이후 난징에 도읍을 정한 국민당 정부가 도주하자 대학살이 발생했으니 어찌 진시황의 ‘저주’가 아니란 말인가?

중국 최대 과거시험장 강남공원...4大 공자 사당 부자묘

난징 시내를 흐르는 지회하. ⓒ최종명

장강의 지류인 진회하(秦淮河)를 따라간다. 진시황이 오른 방산의 수맥과 연결돼 일찍부터 용장포(?藏浦)라 불렀다. 한나라 때는 회수, 당나라 이후 진회라 했다. 장강으로 스며든 용맥은 양저우, 난퉁을 지나 상하이 앞바다로 흘러간다. 용의 기운을 받아 상하이가 20세기 세계 도시로 성장한 것일까? 유람선이 떠다니고 조벽에는 용 두 마리가 구슬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난징 시내 진회하 부근의 '강남공원' 입구 패방 ⓒ최종명

진회하 옆에 과거시험장인 강남공원(江南?院)이 있다. 남송 시대인 1168년에 처음 건축됐으며 명청 시대 최대 규모의 시험장이었다. 청나라 동치제 시대에 2만칸이 넘는 규모로 2만명이 넘는 응시생을 수용할 정도였다. 1905년 과거제가 중단되자 건물 대부분이 철거됐다. 건물 몇 개만 남아 박물관이 됐다. 오후 10시까지 개방한다. 패방을 지나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로 들어선다.

강남공원의 지공당 깃발과 등용문. ⓒ최종명

지공당(至公堂) 마당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전도가 유망하다는 뜻의 봉정만리(?程万里)가 먼저 보인다. 경전에 밝은 이를 골라 벼슬을 시킨다는 명경취사(明?取士),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찾는다는 위국구현(??求?)이 양쪽에 나란하다. 장원급제(?元及第)와 연중삼원(?中三元)도 펄럭이고 있다. 향시(??), 회시(??), 전시(殿?)에 차례로 수석으로 급제하면 연중삼원이다. 황제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 1등이면 장원이라 한다.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로 급제했다고 한다. 시험을 보러 들어설 때 용머리를 건너야 한다. 이를 등용문(登??)이라 한다. 황하를 거꾸로 솟아오르는 잉어가 전설에 등장한다. 두 마리 잉어에 조명이 비치고 있다.

강남공원 지공당의 괴성. ⓒ최종명

열린 문으로 괴성(魁星)이 외발로 서 있다. 양손에 연적과 붓을 들고 있다. 옛날에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수재가 있었다. 글을 아주 잘 지었는데 곰보이고 절름발이였다. 황제 앞에서 시험을 봤다. 용모를 보고 심기가 불편한 황제가 건성으로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다. ‘곰보 얼굴은 천상을 반영하니 별을 따서 바칠 수 있습니다(麻面映天象, 捧摘星斗)’라고 대답했다. 다리에 대한 힐난에는 ‘다리 하나로도 용문을 넘었으니 장원입니다(一脚跳??, ?占??)’라고 응수했다. 오두(??)는 자라 머리다. 문장의 신이 된 괴성이 자라를 밟고 당당하게 노려보고 있다.

강남공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방, 호사를 보여주고 있다. ⓒ최종명


진사에 통과하면 말을 타고 거리를 누볐던 장면을 흙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최종명

시험을 치르는 방을 호사(?舍)라 한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몸수색을 받고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보통 며칠씩 시험을 치른다. 낮에는 시험을 치고 밤에는 잠을 잔다. 청나라 말기 전성기에 2만개가 넘는 호사가 있었다. 과거를 통과해 진사가 되면 말을 타고 거리를 누빈다. 100여개의 흙 인형으로 재현했다. 오늘날 카퍼레이드처럼 군중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면 밤잠 줄여 공부한 보람을 느꼈을 듯하다.

밤이 되면 진회하에 유람선이 운행한다. 야간 조명에 조벽의 용이 더욱더 찬란하다. ⓒ최종명


부자묘 입구의 영성문. ⓒ최종명

진회하에 어둠이 깔리면 조벽의 용이 불타기 시작한다. 뱃놀이 나온 사람도 많다. 조벽을 등지면 부자묘(夫子?)다. 북송 시대인 1034년에 처음 세웠다. 베이징, 취푸, 지린에 있는 공묘와 함께 4대 공자 사당이다. 상하이의 성황묘, 쑤저우의 현묘관, 베이징의 천교광장과 함께 4대 저잣거리로도 유명했다. 담장 옆으로 지금도 시장이 형성돼 있다. 그래서인지 밤에도 개방한다. 낮보다 밤에 색다른 분위기와 만난다. 공자의 존칭인 부자를 사당 이름으로 하는 경우는 몇 군데 없다. 입구의 영성문(?星?)을 지나 들어간다. 영성은 하늘에 있는 문창성(文昌星)이며 공자를 상징한다. 소전(小篆)으로 쓴 글씨가 고아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공자 사당인 부자묘의 대성전. ⓒ최종명


부자묘 대성전의 물 항아리 속의 꽃과 촛불. ⓒ최종명

대성전이 활활 불 난 듯하다. 유불선 어느 사당도 이렇게 밤에 대문을 열지 않는다. 공자행교상이 조명을 받아 하얗게 나타나고 지붕과 처마 윤곽도 또렷하다. 양쪽으로 단목사를 비롯해 제자들이 도열해 있다. 아래에 조명을 설치해 공손한 자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물을 담은 항아리에 촛불과 꽃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마당 양쪽에 하나씩 놓여 있는데 대성전 용마루에 있는 용 두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손으로 살짝 물길을 만드니 돌아가는 촛불의 행렬이 은은하다. 황홀한 분위기에 취해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주위는 경건하고 고요하다.

부자묘의 동남제일학 정문. ⓒ최종명

대성전 뒤 동남제일학(?南第一?)은 학궁이다. 사당과 학교가 함께 위치하는 관례에 따랐다. 편액 글씨는 난징 출신으로 청나라 건륭제 때 장원으로 급제한 진대사(秦大士)가 썼다. 남송의 재상 진회(秦?)도 난징 출신이다. 여진족의 금나라에 대항한 영웅 악비를 모함한 인물이다. 금나라를 섬기고 조공을 바쳐 간신의 대명사로 꼽힌다. 진대사는 진회의 후손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국사를 편찬하고 조칙을 작성하며 황제에게 자문하는 한림원에서 근무했다. 야사에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건륭제가 ‘정말 진회의 후손인가?’라고 물었다. 구구절절한 핑계를 대지 않았다. 한마디로 응수했다. 황제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고 다시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일조천자일조신(一朝天子一朝臣), ‘천자가 바뀌면 신하도 바뀐다’라는 말이다.

부자묘 동남제일학의 명덕당 마당. ⓒ최종명


부자묘 동남제일학 마당의 예운종. ⓒ최종명


부자묘 동남제일학 마당의 성음고. ⓒ최종명

마당으로 들어서면 남송의 문학가이자 정치가인 문천상이 작명한 명덕당(明德堂)이 나온다. 사방에 홍등을 밝히니 몽환의 분위기를 풍긴다. 오른쪽(동쪽)과 왼쪽(서쪽)에 종과 북을 둔 정자가 마주 보고 있다. 1999년 공자 탄신 2,550주년을 기념해 청동으로 주조했다. 공자가 주유하는 장면을 새기고 가운데에 예운종(???)이라 적었다. 반대쪽 북은 성음고(?音鼓)다. 종과 북에 이름을 붙여준 이는 공자의 77대 후손인 쿵더마오 여사다. 1917년에 태어난 쿵 여사는 중국 유일의 종신 정치협상회의 위원이기도 하다. 대도지행(大道之行)으로 시작하는 예기의 예운 편을 인용해 썼다. 공자의 음성이 울린다는 북은 1977년 후베이성 충양에서 출토된 유물을 모방해 만들었다. 3,000년도 넘는 상나라 말기 작품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고다. 보물급 종과 북에 어울리는 정자를 세웠다. 습례정(??亭)과 앙성정(仰?亭)이다.

3,000년 전 상나라 말기 청동고 한 쌍인 도철문고(왼쪽)와 쌍조타고. ⓒ최종명

충양의 청동고는 바닥과 머리, 몸으로 3등분돼 있다. 몸체에 있는 문양은 전설 속 괴물인 도철의 머리 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도철문고(???鼓)라 부른다. 우한의 후베이성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중 하나다. 상나라와 서주 시대에 출토된 청동고는 한 쌍으로 제작해 사용됐다. 이 북의 ‘배필’이 당연히 있다. 머리 부분에 두 마리 새가 등을 맞대고 있고 악어 가죽을 붙여 압정한 쌍조타고(???鼓)다. 몸체에 얼굴을 양각하고 손과 다리를 뻗은 모습을 새긴 명품이다. 언제 어떻게 가져갔는지 모르지만, 일본 교토의 센오쿠박고관(泉屋博古?)이 기신고(夔神鼓)라는 이름으로 소장하고 있다.

부자묘 앞 진회하 야경. ⓒ최종명

부자묘 옆길을 따라 나오면 짙은 어둠만큼이나 진한 조명이 맞아준다. 울긋불긋하고 번쩍이는 장면, 눈과 귀가 서로 달리 반응한다. 눈은 즐겁지만 귀는 약간 괴롭다. 밤이 깊어갈수록 진회하 야경에 취한 사람들의 함성까지 시끄럽다. 방금 전까지 고요하던 분위기와 너무 달라 무엇이 본래 모습인지 알 길이 없다. 해롱거리며 걷다가 보면 어느새 난징의 밤은 조용히 물러난다.

중국의 국부, 삼민주의자 쑨원이 잠든 중산릉

베이징 중산당의 쑨원 조각상과 그의 친필 ‘천하위공’. ⓒ최종명

예운 편에 나오는 대도지행은 천하위공(天下?公)이다. 청나라를 멸망시킨 신해혁명의 토대가 된 삼민주의를 역설한 쑨원의 실천 규범이었다. ‘공화’나 ‘공공’의 세상을 추구한 그는 1866년 광둥 남부의 추이헝촌(翠亨村)에서 태어나 1925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베이징 자금성 서쪽에 위치한 사직단 전각에 그의 호를 딴 중산당(中山堂)이 있다. 친필로 쓴 천하위공 아래 늠름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중산릉 계단을 따라 오르면 쑨중산기념관이자 능침이 나온다. ⓒ최종명


중산릉의 쑨중산기념관. ⓒ최종명

말년에 이르러 소련과 연합하고 중국공산당을 받아들여 민족통일을 염원한 유언을 남겼다. 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난징의 자금산(紫金山) 자락에 묻히길 바랐다. 중산릉(中山陵)의 박애(博?) 패방을 지나 평탄한 길을 걷는다. 정자를 지나 계단을 따라 한참 오르면 능침이 나온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국부로 칭송하는 인물이다.

삼민주의자 쑨원의 능침이 조성된 중산릉. ⓒ최종명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에 소원대로 잠들었다. 12년 후에 벌어진 일본군의 만행은 상상도 못을 것이다. 영혼이 되어서라도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의 통일을 원했던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내전의 상처를 남기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도피했다. 마오쩌둥 정부가 집권해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됐으나 여전히 통일은 요원하다. 기원전에 다녀간 진시황의 망령이란 말인가? 국부의 무덤이 지키고 있어 그나마 오늘날 중국이 ‘진흥’하고 있는가?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며 난징 시내를 바라볼 뿐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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