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국가정보원법 개정을 저지할 목적으로 진행 중인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13일 ‘강제 셧다운’에 착수했다. 민주당은 지난 10일 “야당을 존중한다. 필리버스터를 종료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무기력했던 국민의힘이 전의를 불태우며 필리버스터를 연말까지 이어가려 하자, 거대 여당의 의석수를 앞세워 ‘조기 종결’에 나선 것이다. 다수당의 일방적인 법안 처리에 제동을 거는 소수당의 합법적 견제 장치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무력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소수당 권리 필리버스터, 의석수로 셧다운
민주당은 “본회의서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 종결 투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12일 오후 8시 10분쯤 민주당은 국회 의사과에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서를 제출했다. 동의서 제출 24시간 후에 재적의원 5분의 3(180석) 이상이 찬성하면 필리버스터는 종료되고, 곧바로 국정원법 개정안에 의결 절차가 시작된다.
민주당은 강제 종료가 어렵지 않다는 입장이다. 민주당(173명·구속된 정정순 의원 제외)과 열린민주당(3명), 민주당에서 탈당ㆍ제명된 의원(3명), 기본소득당(1명)을 총동원하면 180명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코로나 확진자가 1,000명을 돌파한 중차대한 시기에 국회가 소모적인 무제한 토론만 이어간다면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야당 존중한다"더니 말 바꾼 민주당
민주당은 지난 10일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하자 “야당을 존중한다”며 당분간 강제 종료할 의사가 없다고 공언했다. 최우선 과제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이 같은 날 본회의를 통과한 만큼, 나머지 쟁점 법안을 밀어붙여 ‘입법 독주’ 프레임에 불 붙일 필요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제대로 끌고 가지 못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9일 국민의힘에서 공수처법 반대 필리버스터에 나선 건 김기현 의원 1명 뿐이었다.
필리버스터는 민주당 예상과 다르게 굴러갔다. 국민의힘 초선 의원 58명 모두가 참여를 결의한 게 시작이었다. 지난 7월 ‘저는 임차인이다’라는 주제의 5분 발언으로 화제를 모은 초선 윤희숙 의원은 11일 오후부터 12시간 47분 동안 반대 토론을 이어가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을 깼다. 이에 국민의힘의 투쟁 의지가 치솟았고, ‘필리버스터 정국’이 연말까지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22일부터 시작되는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일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개혁 법안의 처리 스케줄에 적신호가 켜지자, 민주당은 사흘 만에 말을 바꿨다.
국민의힘은 강하게 반발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처음에는 ‘언제까지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며 “초선 의원들이 모두 가담하고 윤희숙 의원이 최고시간을 경신하고, 국민들이 알기 시작하니까 막겠다고 나선 것”이라고 했다. 같은 당 박수영 의원도 “코로나를 이유로 들었는데, 필리버스터 시작 때도 하루 확진자가 600명에 근접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했다.
'내로남불' 필리버스터
민주당의 태도가 ‘내로남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맞불 토론자'로 나선 김경협 민주당 의원은 윤희숙 의원을 겨냥해 “책은 평소에 읽어야지 국회 토론 시간에 읽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직격했다. 윤 의원이 필리버스터 도중 프랑스 정치학자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책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으며 민주당의 개혁 입법 강행을 ‘전제정’이라고 비판한 것을 비꼰 것이다. 하지만 2016년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토론 때 민주당 의원들은 헌법 전문을 낭독하거나, 인터넷 댓글 수백 개를 그대로 읽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192시간 27분간 필리버스터를 했지만, 이번엔 약 60시간 만에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는 셈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