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그들이 저들과 함께 걸었다

입력
2020.12.14 04:30
24면
0 0

루실 브리지스(Lucille Bridges)

1960년 11월 뉴올리언스의 6세 소녀 루비 브리지스는 학교 당국과 백인 주민들의 격한 반발을 무릅쓰고 '백인 학교'에 입학, 교육 분리 차별 극복의 아이콘이 됐다. 어머니 루실은 위협과 생활고, 이혼까지 감당하며 어린 딸을 저 길로 이끌었고, 늘 곁을 지키며 격려했다. 그 사연을 소재로 한 노먼 록웰의 63년 그림 앞에 선 2006년의 루실 브리지스. AP 연합뉴스

1960년 11월 뉴올리언스의 6세 소녀 루비 브리지스는 학교 당국과 백인 주민들의 격한 반발을 무릅쓰고 '백인 학교'에 입학, 교육 분리 차별 극복의 아이콘이 됐다. 어머니 루실은 위협과 생활고, 이혼까지 감당하며 어린 딸을 저 길로 이끌었고, 늘 곁을 지키며 격려했다. 그 사연을 소재로 한 노먼 록웰의 63년 그림 앞에 선 2006년의 루실 브리지스. AP 연합뉴스


타밀계 인도인 어머니와 아프리카계 자메이카인 아버지의 딸인 미국 부통령 당선자 카멀라 해리스(1964~)는 자기 인종 정체성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밝혀 왔다. 당선 직후 더 알려진 캠페인 포토 일러스트 'That Little Girl Was Me(그 소녀가 바로 나)'는 그의 사진에 1960년 11월 공립학교 인종 분리 차별 장벽을 넘은 6세 소녀 루비 브리지스(Ruby Bridges)의 실루엣을 그림자로 합성한 거였다. 루비가 연 길을 함께 걸어 만 60년 만에 백악관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WTF아메리카 대표 고든 존스와 일러스트레이터 브리아 괼러가 만든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 당선자 홍보 포스터. 루비 브리지스의 실루엣을 그림자로 합성한 저 작품의 제목이 'That Little Girl Was Me'이다. wtfamerica2017.com

WTF아메리카 대표 고든 존스와 일러스트레이터 브리아 괼러가 만든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 당선자 홍보 포스터. 루비 브리지스의 실루엣을 그림자로 합성한 저 작품의 제목이 'That Little Girl Was Me'이다. wtfamerica2017.com


하지만 저들의 앞뒤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동행이 있었다. 우선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62세 흑인 남성 고든 존스(Gordon Johns)을 언급해야 한다. 시사 정치풍자 디자인 회사 'WTF 아메리카(현 @goodtrubble)'의 CEO로 브리지스 또래인 존스에게도 유년시절 백인 아이들이 통학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며 바라본 경험이 있다. 디자인- 정치운동 겸 사업을 해온 그는 2016년 트럼프 당선 직후 "I'm not anti American. I'm just anti-stupid (나는 반미가 아니라 어리석음에 반대한다)'란 슬로건을 새긴 T-셔츠를 제작해 헐값에, 즉 캠페인 용으로 판매했다. 트럼프의 무슬림 입국제한 직후에는 자유의 여신상 가슴에 'You In DANGER GIRL!!(소녀여, 너 위험해!)'이란 문구를 새긴 T셔츠를 출시했다. '위험에 처한 소녀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더 강렬한 메시지를 궁리하던 그는 유년기 자신의 영웅 루비를 떠올렸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감이 줄어 쪼들리던 23세 백인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브리아 괼러(Bria Goeller)와 함께 아이디어를 전개해 노먼 록웰의 63년 그림 'The Problem We All Live With(우리 모두가 처한 문제,1963)'에서 루비의 실루엣을 따와 저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합성 사진으로 T-셔츠와 포스터를 제작해 해리스 선거 캠프에 전달했고, '루비브리지스교육재단'에도 기부해 루비의 서명이 담긴 한정판 T-셔츠를 판매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루비와 카멀라 앞에, 그들을 이끈 여성이 더 있다. 우선 루비의 어머니 루실 브리지스(Lucille Bridges)다. 그는 딸이 자기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뉴올리언스의 백인들이 똘똘 뭉쳐 퍼부어 댄 비열한 말과 위협으로부터 딸을 지키며, 남편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6살 루비를 백인 학교에 입학시켰고, 졸업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미국 공교육 분리 차별 철폐의 아이콘 루비는 어머니 루실의 어깨 위에 있었다. 그가 11월 10일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내 아이는 학교에 보낼 수 있기를"

루실 C. 브리지스(Lucille Commandore Bridges)는 1934년 8월 12일 미시시피 타일러타운(Tylertown)의 한 목화농장 소작농 딸로 태어났다. 흑인 아이들에게 학교는 운명으로부터, 아니 당장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가난해서 그랬고, 보낼 만한 학교가 적어서 그랬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면 돈도 돈이지만, 당장 일손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초등학교 3년을 마친 뒤에도 학교를 다니는 흑인 아이는 그래서 드물었다. 그나마 다닐 수 있는 학교는 집에서 먼 흑인학교였고, 백인 학교에 비해 시설 등 모든 게 열악하고 커리큘럼도 달랐다.

어린 루실은 목화를 따며 "통학버스가 와서 백인 아이들만 태워가는 모습을 울면서 바라보곤 했다"고, "훗날 결혼하면 내 아이 만큼은 꼭 학교에 보낼 수 있기를 기도했다"고 말했다. 1953년 22세의 루실은 정비공 에이번 브리지스(Abon Bridges, 78년 별세)와 결혼해 이듬해 9월 맏딸 루비를 낳았다. 미 연방대법원의 '브라운 V.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 즉 캔자스 주 토피카의 8세 소녀 린다 브라운(2018년 작고)의 부모가 흑백 분리 교육에 위헌 소송을 걸어 만장일치로 승소(54년 5월 17일)한 직후였다. 루실의 기도가 이뤄진 셈이었다. 루실 내외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55년 큰 도시 뉴올리언스로 이사했다. 남편 에이번은 고속도로 휴게소 점원으로, 루실은 호텔 청소원으로 일하며 잇달아 태어난 8남매를 키웠다.

하지만 연방대법원 판결이 곧장 각 주의 공교육 분리 차별을 없애 주진 않는다. 유사 소송 등을 거쳐 주법이 개정돼야 하고, 법이 바뀌어도 법을 우회해 실질적 분리 차별을 지속시키려는 반동적 법-제도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흑인 아이들이 백인 학교에 진학하려면 별도 시험을 쳐서 학습 능력을 인정받게 한 것도 그 예였다.

60년 11월 연방보안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백인 학교를 나서는 만 6세의 루비. 사진에는 없지만, 어머니 루실은 늘 어린 딸의 곁을 지키며 용기를 북돋웠다. AP 연합뉴스

60년 11월 연방보안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백인 학교를 나서는 만 6세의 루비. 사진에는 없지만, 어머니 루실은 늘 어린 딸의 곁을 지키며 용기를 북돋웠다. AP 연합뉴스


루비는 흑인 165명이 치른 백인학교 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한 5명 중 한 명이었다. 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의 독려와 지원 속에 루실은 딸 루비를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백인 학교 '윌리엄 프란츠(William Franz) 초등학교'에 입학 원서를 냈다. 그 일이 알려지면서 마을 식료품가게는 루실 가족에게 물건을 팔지 않았고, 에이번은 직장을 잃었고, 미시시피의 조부모들도 소작하던 땅에서 쫓겨났다. 루실은 물러서지 않았다. 긴장이 고조되고 이목이 집중되자 아이젠하워 정부는 루실-루비 모녀를 보호하기 위해 연방보안관을 파견했다.

1960년 11월 14일 루비의 첫 등교일, 수백 명의 백인 주민· 학부모들이 학교 앞에 모여 "검둥이(Nigger)!" "빨갱이(Communist)!" 등을 외치며 계란과 토마토를 던졌다. 유명한 캐럴을 개사한 글의 피켓 'All I Want for Christmas is A Clean White School(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하는 건 오직 순백의 학교)'도 등장했고, 흑인 인형을 담은 모형 관을 들고 시위에 나선 이도 있었다. 루실은 어리둥절해 하는 딸에게 "뒤돌아보지 말고 기도하라"고, "무지(ignorance)한 탓이니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부모들이 막아 등교를 못한 백인 재학생 500여 명도 그 풍경을 지켜봤다.

등교 첫날 루비는 맡아 가르치겠다는 교사가 없어 종일 교장실에 앉아 있어야 했고, 이튿날에야 보스턴에서 자원한 교사 바버라 헨리(Barbara Henry)를 만날 수 있었다. 루비는 담임 헨리와 만 1년동안 단 둘이서, 때로는 루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을 받았다. 연방보안관이 그들의 교실을 지켰고, 루비는 식당도 운동장도 이용할 수 없었다. 교실은 루비에겐 유사(類似) 감옥이었다.

담임 헨리는 실질적 통합교육을 위해 교장에게 건의도 하고, "실태를 교육 당국에 폭로하겠다"며 항의도 하면서 루비를, 마음까지 보살폈다. 이듬해 가을부터 흑인 학생들이 하나둘 입학하면서, 학교도 조금씩 달라졌다. 훗날 루비는 "선생님도 나도, 단 하루도 결근 결석한 적이 없었다"고, "헨리는 또 한 명의 어머니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올해 88세인 헨리는 "루실은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교실에 함께 있곤 했는데, 그는 몰랐겠지만 그의 존재는 내게도 큰 위안과 힘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버지 에이번이 루비의 백인학교 입학을 반대한 까닭은 환대 받지 못하는 곳에 딸을 보내기 싫어서였다. 한국전쟁 베테랑인 그에겐 백인 전우들과 함께 싸우고도 한 막사에 눕지 못하고 밥도 함께 먹지 못한 경험이 있었다. 그 분노와 설움을 딸이 겪는 걸 원치 않았던 거였다. 이웃들이 새 일자리를 주선하기도 했지만 부부의 불화는 점점 심해졌고 60년대 말 이혼했다.

1960년 루비의 등교를 반대하는 뉴올리언스의 백인들. 피켓에는 분리차별 법률 수호와 "All I Want For Christmas is A Clean White School' 등이 적혀 있다. me.me

1960년 루비의 등교를 반대하는 뉴올리언스의 백인들. 피켓에는 분리차별 법률 수호와 "All I Want For Christmas is A Clean White School' 등이 적혀 있다. me.me

루비의 등교 투쟁은 60년대 숱한 사건과 이슈들에 묻혀 이내 잊혔다. 루실은 혼자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늙어갔고, 루비도 고교를 졸업한 뒤 결혼(남편 Malcolm Hall)하고 여행사에 취직해 만 15년을 일하며 네 아들을 낳아 키웠다. 루비가 자신의 등교 투쟁을 소재로 한 노먼 록웰의 63년 그림을 처음 본 것은 고교를 졸업하던 70년대 초였다. 하지만 잠시 남다른 감회에 젖었을 뿐,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했다고 한다.

가난의 차별이 법의 차별을 대체하다

루비의 삶은 1992년 11월, 막내 동생 밀턴(Milton)이 총기사고로 숨진 뒤 어린 조카들을 맡아 키우면서 달라졌다. 조카들의 학교가 루비의 모교인 윌리엄프란츠였다. 하지만 그 무렵 학교는 재학생 전원이 흑인인, 흑인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법적 분리차별을 경제적(가난의) 분리차별이 대체한 거였다. 루비는 한국의 학교운영위원과 유사한 '학부모 연락관(Parent Liaisons)'직에 자원, 학교 및 교사-학부모 협력 업무를 관장하며, 어머니 루실의 바통을 이어 새로운 분리 차별 극복운동에 나섰다. 지역-전국을 돌며 학생과 교사, 교육 공직자들에게 자신의 시대와 경험을 들려주는 강연을 시작했다. "지금의 학교 분리 차별은 누가 옆자리에 앉느냐가 아니라 여러분의 학교가 얼마나 넉넉한 자원을 누릴 수 있느냐에서 비롯된다." 그는 1999년 비영리 '루비 브리지스 교육재단'을 설립했다.

브루킹스연구소 브라운센터는 캘리포니아 주 초중등 공립학교 7,180곳을 대상으로 인종별 학칙 징계 실태를 조사, 2015년 기준 아프리칸-아메리칸 재학생 100명 중 17.8명이 정학 이상 징계를 받은 반면, 히스패닉은 5.2%, 백인은 4.4%, 아시안계는 1.2%란 사실을 공개했다. 인종별 학력 성취도 편차도 컸다. 원인은 주거 및 교육 환경 불평등, 롤모델의 부재 등 복합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난과 기회 불평등이었다. 흑인은 미국 인구의 약 14%를 점하지만 2020년 11월 기준 재소자 흑인 비율은 38.5%다. 평균 소득도 흑인은 백인보다 평균 38% 적고, 뉴욕주 유색인종 코로나19 사망률은 백인보다 3배 이상 높았다. 경제적 지위에 따른 '주거 분리(resegregation)'는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법적 분리차별의 야만을 겪고 인종갈등의 활화산 위에 구축된 사회여서 특히 민감하다. 루비 브리지스의 타깃이 그거였다.

재단을 설립하며 루비는 자신의 유년시절과 현재를 대비한 책 'Through My Eyes'를 출간했다. 어린 루비의 심리 트라우마를 보살피기 위해 그를 정기적으로 상담했던 하버드대 심리학자 로버트 콜스(Robert Coles)는 50주년이던 2010년 아이들을 위한 책 '루비 브리지스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렇게 미국 언론과 시민들은 6세 소녀 루비가 어머니와 함께 넘고자 했던 벽을 어른이 된 그가 지금도 넘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현실을 새삼 되새겼다. 콜스는 인세 전액을 루비재단에 기부했다.

윌리엄프란츠 학교는 2005년 4월 미국 등록사적지로 지정돼 얼마간의 지원을 받게 됐지만, 넉 달 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결딴이 났다. 루비는 주 정부 등의 지원을 받아 대안학교 성격의 자립형 공립학교(Charter School)인 '아킬리 아카데미(Akili Academy)'로 재개교하는 일을 주도했다. 사회 정의와 공동체 윤리, 차이와 다양성의 가치를 가르치는 학교, 인종 갈등의 역사가 아니라 인권-시민권 신장을 위해 함께 투쟁해온 역사를 가르치는 학교를 만드는 게 루비와 그의 재단이 추구하는 목표다. 궁극적인 목표는 어머니 루실과 스승 헨리가, 브라운 판결을 이끌어낸 린다 브라운의 부모가, 또 첫 등교일 집에 찾아와 격려하고 밤마다 당번을 정해 백인들로부터 루비 가족을 지켜주던 흑인 이웃 모두가 꿈꾼, 모든 차별을 극복한 학교였다.

엄마 손 잡고 아장아장 걸으며, '군중들을 보고도 무슨 축젯날인가 여겼다'는 딸이 지금 개척해가는 새 길을 노년의 루실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어머니 루실이 숨지던 날, 루비가 낸 새 책 제목은 'This Is Your Time'이었고, 일주일 뒤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자서전 'A Promised Land'를 냈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