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순 달구벌 명인
“제 36년 미용인생의 출발점은 이탈리아 로마 광장입니다.”
이은순 명인(65·동양헤어아트 대표)은 대구경북에서 ‘최초를 휩쓴 미용사’로 통한다. ‘대구·경북 최초 미용분야 산업현장교수와 우수숙련기술자’로 시작해 ‘미용분야 달구벌 명인 1호’, ‘초대 미용 달구벌명인 회장’에 이르기까지 ‘최초’를 수확하다시피 했다.
이 명인이 성장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경험은 유럽연수였다. 특히 1980년대 유럽 미용계의 위상은 이 명인의 눈높이와 자부심을 한껏 높여놓았다. 그가 한 단계씩 발전할 수 있는 정신적 터전을 그곳에서 닦았다.
한국은 머리를 맨 나중에, 유럽은 제일 먼저
“1980년대만 놓고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머리 스타일이 단조로웠던데 반해 유럽 사람들의 머리는 마치 예술 작품 같았어요. 다양한 머리 스타일을 시도하고 있었죠.”
왜 그런 차이가 나올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결정적 차이는 미용의 위상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옷과 신발을 고르고, 화장을 마친 후 마지막에 옷과 화장에 어울리도록 머리를 만졌어요. 그러나 유럽에서는 머리를 제일 먼저 만졌어요. 지금은 우리나라도 패션의 시작이 머리가 됐지만, 1980년대엔 맨 마지막이었죠.”
그 사실을 깨닫자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자긍심과 함께 일에 대한 애정도 함께 커졌다. 열정이 샘솟았다. 즐겁게 일하니 실력이 나날이 늘어갔다.
1996년에는 우리나라 헤어 미용 국가대표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돼 세계미용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토탈 패션으로 2등을 차지했다.
달구벌 명인 신청 “미용인은 안 됩니다”
이 명인은 미용을 뒤늦게 시작했다. 셋째 딸까지 낳고 30대 중반의 나이로 미용계에 입문했다. 마음이 조급했다. 1:1 교습을 받으면서 눈을 뜨나 감으나 오직 미용에 대해 생각했다. 1986년부터 정기적으로 유럽에 다녀온 것도 늦게 시작한 만큼 뒤처지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명인은 “그런 세월이 쌓이고 쌓여 명인의 반열에까지 올랐다”면서 “늦었다는 마음이 오히려 쾌속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고백했다.
“미용인은 안 될 텐데요.”
2016년에 달구벌 명인을 신청했다. 시청에 신청 서류를 내자 직원이 “어려울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전례가 없다는 말과 함께 “미용은 서비스, 실기 분야였기에 서류상으로 명인임을 증명할 자료가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일단 서류를 내보기로 했다.
그 결과 몇 차례의 심사를 거쳐 2016년 미용 부문 최초 달구벌 명인이 됐다. 헤어 미용 분야에서 꾸준히 실력과 실적을 다져온 점과 정기적인 봉사실적이 큰 역할을 했다. 이 명인이 달구벌 명인을 개척한 뒤로 매년 미용 부문 명인이 탄생했다. 이 명인은 달구벌 명인으로 선정되었을 때 남편이 해준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당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진작에 알았어. 미용 말고 공부를 했다면 판검사를 했을 거야!”
심리적 안정감 주는 것도 미용의 역할
이 명인을 성장시킨 또 다른 요인은 ‘애살’이다. 애살은 대구 방언으로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고자 하는 욕심과 애착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명인은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다.
그에게 헤어 미용은 손님에게 외형적 아름다움을 주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것도 미용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들어올 때보다 나아진 머리 스타일과 함께 기분도 나아져야만 소임을 다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 명인은 둘 중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나가는 손님이 있으면 마음이 좋지 못하다. 보통 충분한 대화로 가장 적절한 접점을 찾을 수 있지만, 설득이 힘들 때도 있다.
“한번은 다짜고짜 ‘머리를 싹둑 잘라주세요’하는 분이 있었어요. 아마도 무슨 일로인가 크게 상심했겠지요. 그 손님이 원하는 대로 짧게 자르면 아주 이상해질 게 뻔해서 이런저런 말로 다른 스타일을 권유했어요. 하지만 완강하게 ‘못난이가 되어도 좋으니 그냥 잘라주세요’하고 말하더군요. 눈시울이 뜨거워졌죠. 너무 안타까워서요.”
이 명인의 ‘애살’은 미용업계에서도 유명하다. 동료들은 “그런 열정과 애착이 명인의 반열에 올렸다”고 입을 모은다.
여고생 손님에게 미용을 권한 이유
이 명인이 명인을 향한 첫걸음을 이탈리아 로마 광장에서 시작했다면, 사람을 아우르는 삶의 품격은 고객들을 통해 배웠다.
20년 전, 가게 단골인 모녀가 있었다. 딸이 대학 진학을 앞두었을 즈음 어머니가 지병으로 별세했다. 남겨진 딸은 대학 입학금은 커녕 당장 학비와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명인은 딸을 찾아가 미용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우선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하자. 내가 많이 도와줄게.”
여고생은 이 명인의 제자가 됐다. 미용사 전문 과정 학원을 등록시켜 미용수업을 받도록 했다. 손재주가 뛰어나 미용장도 땄다.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긴 제자는 틈틈이 전화를 걸어온다.
“그때는 친구들이 저를 불쌍하게 봤는데, 지금은 다들 부러워해요.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 명인은 그 제자를 통해 미용이 ‘기술’을 넘어 ‘인술(仁術)’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 명인은 “사람 인(人)자가 어질 인(仁)자와 혼용되어 쓰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그런 면에서 달구벌 명장(匠)이 아니라 명인(人)인 것도 마음에 쏙 든다”면서 “기술로 인(仁)을 이루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을 넘어 사람을 만나는 미용사
이 명인과 이웃사촌이었던 장애인 부부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부부의 초등학생 딸이 울면서 이 명인을 찾아왔다.
“혹시 우리 집에서 달려 나오는 아저씨 못 봤어요? 아저씨가 저희 집 금을 다 훔쳐 달아났어요.”
금은방에 가보니 부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경찰에 신고한 뒤 미용실로 돌아와 돈통을 열고 그날 벌어들인 수익을 모두 종이 봉투에 넣었다. 부부에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그냥 주는 돈 아니다. 나중에 딸이 자라서 돈을 벌면 그때 꼭 갚아. 이 돈 안 받으면 내 얼굴 다시 볼 생각하지 마라.”
이 일로 구민상을 받았다. 부부는 먼 곳으로 이사간 뒤에도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머리를 하러 이 명인의 집을 찾아왔다. 휠체어까지 타고 먼 길을 오는 까닭에 차라리 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이왕 돈 쓰는 거 이 집에서 써야 마음이 편하다”는 부부를 뿌리칠 수 없었다.
“기술을 베푸는 사람과 그것을 받는 사람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게 뿌듯해요. 기술을 넘어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다시 기술을 완성해나가는 것 그것이 명인(仁)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다듬는 미용사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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