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엿뉘엿, 어둑어둑, 추적추적, 무심한 가을바람이 휙, 낙엽이 공중으로 붕 뛰어올랐다가, 흐드러진 달빛, 미닫이문이 드르륵, 비가 올 듯 말 듯 우중충한 새벽.'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말들이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머릿속에 있는데,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아득하다.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다본 적은 언제였는지, ‘흐드러진 달빛’은 본 적이 있는지 까마득하다. 미닫이문의 ‘드르륵’ 소리가 그립고, 물기를 머금은 새벽의 ‘우중충한’ 기운이 아련하다.
삶은 보고 듣고 만지는 느낌 덩어리인데, 나는 알기만 하고 느끼지는 못하면서 살고 있다. 무심하게 지나치며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오롯이 느끼고 싶다. 내 눈으로 내 귀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몽땅 느끼고 싶다. 매일매일 시시콜콜한 일상을 놓치지 않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며 살고 싶다.
며칠 전, 산이 내 앞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산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덩치가 내뿜은 풍광이 조각나지 않고 전체로 쳐들어왔다. 산이 내 눈에 산을 새겨 넣었는지, 내가 내 눈에 산을 새겨 넣었는지 알 수 없다. 햇볕이 쨍쨍한 한낮이었는데도 나는 뿌옇고 희미한 이른 새벽을 상상했다. 산과 새벽과 나, 우리 셋의 기막힌 조우가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고전적이고 본질적이다. 오래된 시골길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이 변함없이 아름답다. 소쿠리에 가득 담은 감과 손수 기른 채소를 나눠주는 마음은 정겹고도 따뜻하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 꽃을 가꾸는 시간과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 느리고 여유롭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옛날 사진에서는 그리움이 묻어나고, 친구와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와 손으로 쓴 카드 속에는 은근한 사랑이 들어있다.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힘든 세상이다. 세상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고 삶은 팍팍해졌다. 사람들의 상상하는 능력은 퇴화되었고, 본래부터 갖고 있었던 선하고 진실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경쟁하느라 아름다운 것에는 관심이 없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부여잡느라 곁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한다. 아름다운 순간이 언제인지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수세기 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지만 아름다운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올바른 행실과 선량한 친절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고, 들뜸, 설렘, 기대감, 책임감, 늠름함, 용감함도 실은 아름다운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마음, 타인을 너그럽게 대하는 마음,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아름답기 그지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인생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해본다. 세상에는 탐구해야 할 아름다운 것들이 수없이 많은데, 우리 스스로가 눈을 가려버렸기에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거다. 진짜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가끔은 찬찬히 살펴보고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눈앞에 있는 자연의 신비를 그냥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잊고 지냈던 소소한 기쁨을 마음속에 다시 불러오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새로운 행복을 찾을 게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가 무료한 삶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들 덕분이다. 우리가 외롭지 않은 것은 아름다운 것들 덕분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리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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