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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소비되는 한 방식

입력
2020.12.1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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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주신구라

47인의 사무라이 중 주역이었던 두 인물의 초상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

47인의 사무라이 중 주역이었던 두 인물의 초상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


주신구라(忠臣?, 추신구라)는 도쿠가와(?川) 막부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 집권기인 1703년 수도 에도(江戶, 현 도쿄)에서 일어난 사무라이들의 복수극을 소재로 한 일본 전통극 제목이다. 천황 칙사를 영접하라는 명을 받은 다이묘 아사노 나가노리가 의전 자문역인 다른 다이묘 키라 요시히사와 말다툼 끝에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는 바람에 쇼군의 명으로 할복하고 멸문 당하자, 낭인이 된 나가노리의 가신 47인이 와신상담끝에 요시히사의 저택을 기습해 일가를 멸하고, 역시 쇼군의 명으로 모두 할복했다는 이야기. 사무라이의 흔한 복수극이 끊임없이 환기되는 까닭은, 저 짧은 사연 안에 권력 및 공적 질서의 유구한 속성과 사적 의리의 길항하는 의미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전국을 평정하고 막부를 연 쇼군 도쿠가와의 첫 칙령은 사전 허가 없이 사무라이의 에도 진입을 금한 거였다. 절대권력은 공권력과 권위의 독점 위에서만 성립하며, 충의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긴다는 사무라이의 미덕 위에 구축된 권력이라 하더라도, 절대권력의 욕망은 사무라이의 의리나 전통을 넘어설 수밖에 없었다. 충의 대상은 오직 쇼군 하나여야 했고, 그 이데올로기는 평화의 윤리로 정당화됐다. 그러니 나가노리의 칼이 겨눈 것은, 경위나 동기가 뭐였든, 막부 권력이었다. 그 대가는 당연히 죽음이었다. 나가노리의 가신들은 사무라이의 미덕을 중시한 이들이었다. 충절이 아무리 가상하고, 당대 서민과 무사 집단의 칭송을 받았다 해도, 쇼군에겐 할복을 명하는 것 외엔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충돌하는 두 윤리와 욕망은 평화의 균형이 위협받는 순간 거짓말처럼 하나로 뭉친다. 47인 무사의 위패를 둔 옛 나가노리의 영지인 효고현 아코시의 오오이시신사(大石神社) 한 켠에 2차대전 전범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쓴 '의담(義膽)'과 '충의(忠義)'의 두 비석이 서 있다. 의리와 용기도 때와 장소에 따라 배덕도 되고 의담도 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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