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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입력
2020.12.0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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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존 밀턴의 이혼론

청교도 혁명기의 가장 급진적 논객이었던 존 밀턴을 이끈 것은 스스로 선취한 근대적 자유주의였다. 위키피디아

청교도 혁명기의 가장 급진적 논객이었던 존 밀턴을 이끈 것은 스스로 선취한 근대적 자유주의였다. 위키피디아


'실락원'의 작가 존 밀턴(John Milton, 1608.12.9~ 1674.11.8)은 왕의 목을 칠 만큼 격렬했던 청교도혁명기를, 급진적 논객으로 산 지식인이다. 상대는 국왕 및 왕당파 권력이었고,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 보수 종교권력이었다. 당연히 그는 공화주의자였고, 권위와 형식의 교회보다 개인의 신앙을 중시한 청교도 사상가였다. 그 바탕에는 스스로 선취한 근대적 '개인'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었고, 대표적 결실이 1643년 8월의 저 유명한 '이혼론(원제는 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과 '검열 받지 않고 출판할 자유를 위해 존 밀턴이 잉글랜드 의회에 던지는 말'이란 부제를 단 1664년 11월의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였다.

그는 진정한 결혼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구현되며, 사랑을 통해 서로의 고독을 달랠 수 있는 영혼의 결합이 육체적 결합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서로의 영혼이 화합하지 않는다면 이혼도 가능하다는 거였다. 그의 주장은 간통이나 성 불구, 신앙적 불의만 이혼 사유로 인정하던 당대 교회법에 반하는 거였다. 당시 그는 1년 전 결혼한 15년 연하의 아내 메리 파웰(당시 18세)과 별거 중이었다. 밀턴의 입장에서 메리는 지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왕당파였다.

의회는 출판허가법을 제정, 당국의 사전 승인없이 어떠한 원고도 출판할 수 없도록 해서 밀턴의 이혼론 팸플릿 재판 인쇄를 막았지만, 밀턴은 이듬해 증보판을 저자 이름 없이 출간했다. 그런 뒤 출간한 게 '표현의 자유'에 관한 선구적 저작인 '아레오파지티카'였다. 그 역시 윤리와 언로를 독점한 권력, 특히 종교권력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골수 공화파였던 그는 잠깐 공직생활을 했지만 만 43세 때인 1652년 실명한 뒤 은퇴했고,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 후 옥살이와 재산몰수 등으로 신산한 말년을 보내며 '실낙원'을 썼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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