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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만에 벗은 누명... 아흔둘 하르방의 얼굴에 꽃이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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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만에 벗은 누명... 아흔둘 하르방의 얼굴에 꽃이 폈다

입력
2020.12.07 14:37
수정
2020.12.0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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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법, 4·3 피해자 김두황 씨에 무죄 선고
당시 경찰, 증거도 없이 '폭도 지원' 혐의 적용

7일 제주법원 앞에서 제주 4·3당시 일반재판에 회부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김두황 할아버지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7일 제주법원 앞에서 제주 4·3당시 일반재판에 회부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김두황 할아버지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판장이 말했다. "피고인은 무죄."

72년 전 왜 징역을 받는지도 몰랐던 스무 살 청년은 아흔 둘 하르방(할아버지의 제주 방언)이 되어서야 법정에 다시 섰다. 한평생 뒤집어 쓰고 있던 '전과자'라는 오명을 구순(九旬)이 넘어서야 벗게 된 김두황(92) 할아버지. 무죄 판결 직후 그는 "따뜻한 봄이 왔다,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고 기뻐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부장 장찬수)는 7일 미군정청 법령 19호 위반 및 구(舊)형법 77조 내란죄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던 김 할아버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4·3사건에서 군사재판이 아닌 일반재판 수형인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할아버지는 20세때인 1948년 11월 16일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소재 자택에서 영장도 없이 경찰에 체포됐다. 이유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간 김 할아버지는"남로당 가입을 자백하라"는 강요와 함께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총살 협박까지 받았고 한다. 이어 재판이 열렸지만 판사는 김 할아버지에게 질문도 하지 않았고, 진술할 기회도 주지 않고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후 그는 당시의 아픈 기억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자신의 죄명과 선고일자조차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년 전 확인한 자신의 판결문에서 ‘1948년 9월 25일 오후 8시 45분쯤 제주 남제주군 성산면 난산리 김두홍의 집에서 김관삼 등 6명과 무허가 집회를 열고 폭도에게 식량을 주기로 결의했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경찰이 자신에게 폭도를 지원했다고 누명을 씌운 것을 뒤늦게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법원에 재심을 요청했다.

김 할아버지의 조작된 혐의를 증명할 증거는 재심 과정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검찰 역시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는 이날 선고를 통해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날 이례적으로 김 할아버지에게 사과와 위로의 뜻도 전달했다. 재판부는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벌어진 사건 속에서 스무 살 청년이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억울하게 처벌 받았다"며 "한 개인의 존엄이 희생되고 삶은 피폐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92세의 피고인이 그동안 하소연 한번 하지 못하고 자신의 탓으로 여기거나 운명으로 여겨 침묵한 것을 볼 때, 피고인의 응어리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며 “이번 선고가 여생 동안 응어리를 푸는 시작이길 바란다”고 위로했다.

김 할아버지는 무죄 선고 직후 “재판장님 감사하다. 4·3 희생자 신고를 하게 해준 대통령님께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씨의 딸 김연자(63)씨는 “재판을 받는 날마다 아버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이런 날이 찾아와 너무 축하드린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주= 김영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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