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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전략적 선택을 모색하자

입력
2020.12.08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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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연재를 마치며

편집자주

2020년대 지구적 사회 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매주 화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2020년 새해 첫 근무일이었던 지난 1월 2일 오전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민들이 출근을 하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인 2020년대가 열리는 시점을 맞아 지금까지 총 50회에 걸쳐 2020년대의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을 연재했다.한국일보 자료사진

2020년 새해 첫 근무일이었던 지난 1월 2일 오전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민들이 출근을 하고 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인 2020년대가 열리는 시점을 맞아 지금까지 총 50회에 걸쳐 2020년대의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을 연재했다.한국일보 자료사진


그 동안 이 기획에서 나는 우리 시대 지구적 사회 변동을 통해 세계사회와 한국사회의 미래를 살펴보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 시대란 21세기가 열린 이후 지난 20년과 앞으로의 10년이다. 30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하나의 국면이다. 국면의 한가운데서 우리 인류의 선 자리와 갈 길을 숙고해보려고 한 것이 이 기획의 목표였다.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은 ‘제3의’ 사회과학이라 불린다. 근대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정치학·경제학에 이어 세 번째로 체계화됐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정치·경제를 제외한 계급·조직·세대·문화 등을 분석 영역으로 삼는다. 동시에 사회학은 정치·경제·문화를 포괄하는 전체사회를 탐구 대상으로도 둔다. 사회학이 때때로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후자의 태생적 특징에 기인한다.

지난 2007년 8월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로 주가가 대폭락해 서울 목동의 한 증권사 객장에서 한 투자자가 두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07년 8월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로 주가가 대폭락해 서울 목동의 한 증권사 객장에서 한 투자자가 두 손으로 목덜미를 감싸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포스트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거대한 후퇴

사회 전체의 변화를 조망하는 게 사회학의 과제라면, 사회학적 시각에서 우리 시대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것을 예상컨대 후대의 역사가들은 ‘대침체’로 가는 길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의 ‘암중모색기’였다고 부를 가능성이 높다. 대침체란 2008년 발생한 미국발 금융위기를 지칭한다. 1980년대에 기원을 둔 신자유주의는 21세기 개막 전후 절정에 도달했다가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포스트신자유주의로 나아갔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천년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1990년대 말, 리처드 로티는 21세기를 우울하게 전망한 바 있다. 21세기가 되면 사회적 불평등이 확산되고, 저급한 선동 정치가가 등장하며, 병적인 가학성 세계로 회귀해 여성과 소수자를 증오하는 경향이 만연할 것이라는 예견을 내놓았다.

안타깝게도 로티의 예측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이를 분명히 증거했다. 불평등의 확산은 우리 인류를 불만과 불안의 세계로, 포퓰리즘의 발흥은 격정과 분노의 세계로 이끌었다.

지난 20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로는 9.11테러와 이라크전쟁, 미국발 금융위기와 뉴노멀의 등장, 제4차 산업혁명과 플랫폼 비즈니스의 약진, 중국의 부상과 미중 경제전쟁의 개막, 포퓰리즘의 발흥과 민주주의의 위기, 불평등의 강화와 사회갈등의 증대, 정보사회의 진전과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도래, 브렉시트와 민족주의의 분출, 개인주의와 부족주의의 동시 심화,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과 바이러스 폭풍 시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현상들을 관통하는 세 개의 키워드로 나는 ‘뉴노멀’과 ‘불안’과 ‘글로벌 위험사회’를 들고 싶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게 뉴노멀이었다면, 이러한 변화를 겪는 마음의 상태는 불안이었다. 대침체 이후 변화의 방향은 예측하기 어려웠고, 거기에 속도까지 더해져 인류는 낯선 풍경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뉴노멀과 사회적 불안은 더욱 강고하게 결합됐다.

이 낯선 풍경의 세계는 여러 이름을 가졌다. 어떤 이들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렀고, 또 어떤 이들은 ‘글로벌 위험사회’라고 칭했다. 글로벌 위험사회란 말을 주조한 이는 울리히 벡이었다. 벡은 그 사례들로 테러리즘·금융위기·기후변화를 열거했지만, 이것의 가장 생생한 체험은 바로 올해 세계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요컨대, 지구적 차원에서 대침체 이후 암중모색의 한 측면은 볼프강 슈트렉이 제안한 ‘거대한 후퇴’로 명명할 만했다. 거대한 후퇴란 세계 질서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형국을 지칭한다. 동요하는 세계화와 불평등의 강화, 포퓰리즘의 발흥과 민주주의의 퇴조, 그리고 연대와 통합의 시민문화의 고갈은 거대한 후퇴의 구체적인 징표들이었다.


플랫폼 세계에는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사진은 거대 플랫폼 기업 중 하나인 페이스북의 캘리포니아주 소배 본사 입구에 세워진 페이스북 '좋아요' 로고 간판이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플랫폼 세계에는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 사진은 거대 플랫폼 기업 중 하나인 페이스북의 캘리포니아주 소배 본사 입구에 세워진 페이스북 '좋아요' 로고 간판이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끝없는 혁신

암중모색의 다른 하나의 측면은 ‘끝없는 혁신’이었다.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2010년대를 ‘제2의 기계 시대’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들은 톰 굿윈의 말을 인용해 ‘트리플 혁명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굿윈은 우리 시대 경제의 새로운 특징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세계 최대의 택시 회사인 우버는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디어 기업인 페이스북은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는다. (…) 세계 최대의 숙박업체인 에어비앤비는 부동산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트리플 혁명이란 맥아피와 브린욜프슨이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에서 분석하듯 머신·플랫폼·크라우드(군중)가 이끄는 혁명이다.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머신 능력의 혁신, 구글로 대표되는 플랫폼 기업의 부상,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집단지성인 크라우드의 등장은 경제와 산업과 기업의 ‘혼동 속 성장’을 가져왔다. 이 혼동 속 성장을 주도해온 플랫폼의 네 거인이 바로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이었다.

이 플랫폼의 세계에는 당연히 빛과 그늘이 존재했다. 스타트업이 유니콘으로, 다시 데카콘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혁신의 공간이 플랫폼이다. 그러나 동시에 플랫폼은 노동시장과 부의 새로운 양극화가 진행되는 공간이다. ‘얼리 어답터들’은 플랫폼 세계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슬로우 어답터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경제가 혼동 속 성장으로 특징지어졌다면, 사회와 문화는 ‘성장 속 혼동’을 드러냈다. 사회와 문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유비쿼터스를 구현한 스마트폰의 등장이었다. 모바일사회의 진전은 개인적 삶과 사회적 활동의 초연결을 가져왔고, 무엇보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를 열었다.

포스트트루스란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게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도래는 가짜 뉴스들을 범람하게 했고, 정서와 신념이 진리와 도덕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중간적 완충 지대가 사라짐으로써 정치적·문화적 양극화가 더욱 심화돼 온 것은 우리 시대 공론장과 시민문화의 자화상이었다.

요컨대, 끝없는 혁신이 낳은 사회·문화적 결과 역시 뚜렷한 명암을 갖는다. 한편에서 개인주의와 이와 연관된 다원주의 및 민주주의의 도도한 물결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오늘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경유하지 않은 그 어떤 개혁도, 혁명도 불가능하다. 개인은 이제 기술·화폐와 함께 ‘21세기 새로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미셸 마페졸리가 개념화한 ‘부족주의’와 이와 연관된 집단주의 및 포퓰리즘의 경향 또한 강화됐다. 정보 시대는 개인과 네트워크가 복합적으로 중첩되고 결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마누엘 카스텔의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는 바로 이를 증거한다. 개인주의 대 부족주의, 다원주의 대 집단주의, 민주주의 대 포퓰리즘의 혼돈스러운 공존은 우리 시대의 또 하나의 생생한 민낯이라 할 만하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막 열린 2020년대에는 우리 삶을 규정하는 변화의 속도가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배가하는 속도 안에서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가운데,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한 과거에의 애틋한 향수를 품은 레트로토피아도 펼쳐질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변화를 두려워해선 안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오늘날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게 없다는 그 사실 하나뿐이라는 교훈은 인류의 오래된 경험칙이다.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또는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되, 우리 인류가 서 있는 자리와 갈 길에 대해 숙고함으로써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둘째, 전략적 선택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역사의 운명이 아니다. 어느 나라든 그 발전의 경로는 자기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을 고려한 국가와 사회의 전략적 선택을 통해 펼쳐지고 진행된다. 그 경로가 더욱 풍요로운 국가와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집합의지를 모으고 발휘해야 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삶이 훌륭하고 세상이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때로 연민과 자비 같은 사랑의 감정이 혐오만큼 강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증유의 지구적 대재난인 팬데믹의 한가운데서 마사 누스바움이 전한 말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전략적 선택을 구하는 지혜, 그리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 2020년대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선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또 믿는다.

*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에필로그’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 동안 이 기획을 잘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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