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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선생님과 기회의 여신

입력
2020.12.06 14:00
수정
2020.12.06 18:5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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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클래식 거장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정명훈이 선택한 신예 피아니스트 임주희가 격주 월요일자로 '한국일보'에 음악 일기를 게재합니다.

임주희가 그린 지휘자 정명훈.

임주희가 그린 지휘자 정명훈.


이탈리아 시칠리아에는 특이한 동상이 있다. 동상 앞머리는 숱이 많은데 뒷부분은 대머리다. 발에는 날개도 달려 있다. 동상의 정체는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 앞머리에 숱이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것은 기회가 지나가면 잡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발에 달린 날개는 붙잡지 못한 기회가 멀리 달아나기 위해서다. 그러니 기회가 오면 그녀의 앞머리를 꽉 움켜쥐어야 한다. 나도 오카시오의 앞머리를 양팔에 쥐가 나도록 꽉 붙잡았던 기억이 있다.

2013년 겨울 나에게는 두 번째 기회의 여신이 다가왔다. 지휘자 정명훈 선생님 공연의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이다.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오디션을 보러 갔던 날은 생생히 기억난다. 하늘이 너무 맑고 구름이 예뻐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며 휴대폰으로 구름사진을 찍었다. 물론 오디션 대상자는 여러 명이었다. 유학을 다녀온 언니, 오빠들의 면접이 끝나고 마지막이 내 차례였다. 다행히 오디션 결과 서울시향으로부터 다음해 5월에 있는 정기연주회에서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연주는 성공적이었고, 그해 8월에 다시 정명훈 선생님 지휘로 서울시향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세 차례 협주하기도 했다.

언젠가 정명훈 선생님께서 공연 담당자로부터 추천받은 협연자 후보명단을 보시다가 ‘임주희는 요즘 뭐하나?’하고 내 근황을 물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질문에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임주희와 협연을 해서 연주를 망치면 책임을 지겠다'며 나를 협연자로 추천했다는 소식이었다. 기뻤지만 또 한편으론 막중한 책임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연주를 계기로 일본 도쿄에서도 정명훈 선생님 지휘로 도쿄 필하모닉과 세 차례의 협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에서 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정명훈 선생님이 지휘하는 아시아필하모닉과 국내 투어를 했을 때 일이다. 대전에서 리허설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코피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건반을 닦던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단원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무대 밖으로 나와 지혈을 했다. 어렸지만 단원들과 지휘자를 걱정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 자체보다 단원들 모르게 무대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리허설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종종 사람들이 '어떻게 정명훈 선생님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상대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상대방이 정명훈 선생님 정도의 지휘자나 서울시향이라면 더욱 힘든 일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나의 부족함을 애교로 채우려 했다면 기회의 여신을 잡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늘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당신의 앞에는 기회의 여신이 앞머리를 찰랑거리며 서 있을 것이다.


피아니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임주희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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