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처음 확산하기 시작했을 때 우린 현대의학이 금세 해결해줄 거라 믿었다. 사스(SARSㆍ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MERSㆍ중동호흡기증후군) 방역에 성공했다는 자만 때문이었다. 프랭크 M. 스노든 예일대 의학과 명예교수는 수년에 걸친 대학 강의를 토대로 쓴 ‘감염병과 사회’에서 “20세기의 가장 큰 오류가 감염병 종식이 머지않았다는 믿음”이었다고 지적한다. 자만에 빠진 인류의 허술한 방역 체계가 언제라도 세계적인 팬데믹의 위협을 받을지 모른다는 경고다. 코로나19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인 지난해 10월 처음 출간된 책인데 그의 우려는 반 년도 안 돼 현실로 나타났다.
이 책은 감염병 관점에서 사회의 변화를 고찰한다. 감염병이 의학과 공중보건은 물론, 정치, 종교, 예술, 지성사, 전쟁, 국제관계 등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을 두루 살핀다. 의학 치료의 진화, 빈곤, 환경, 집단 히스테리 같은 주제도 빼놓지 않는다. 서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페스트, 천연두, 콜레라, 결핵, 에이즈, 사스, 에볼라 등만 다뤘는데도 800쪽이 훌쩍 넘는다. 한국어판에는 코로나19 관련 내용도 일부 추가됐다.
감염병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각각이다. 페스트는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흙바닥을 콘크리트로 바꿔놓는 등 주거환경에 큰 변화를 줬다. 페스트 법령은 공권력 확대와 절대주의의 부상을 예고했다. 반면 결핵은 엉뚱하게도 상류층 사이에서 번지며 낭만주의를 퍼트렸다. 천재적 작가, 창백한 귀족 여성 같은 이미지를 선망의 대상으로 유행시킨 것이다.
바이러스의 거센 도전이 있을 때마다 인류는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고 조직을 정비하며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고 만다. 조직은 사라지고 예산은 삭감되며 대응책은 서랍 속에 묻힌다.
저자는 사스와 에볼라가 준 교훈을 토대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보건 체계를 곳곳에 만들고 충분한 재정과 인력을 투입해야 하며 국제적으로 공조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의 말처럼 공중보건은 시장의 법칙보다 중요한 최상위 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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