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는 어디를 나왔나.”
“오하이오주립대요.”
“맞아, 좋은 주립대는 많지.”
책을 재미있게 봤기에 영화로도 기다렸던 넷플릭스 ‘힐빌리의 노래’의 한 장면. 온갖 아르바이트로도 감당 안 되는 학비를 메우기 위해 로펌의 임시직이라도 구해야 할 처지가 된 백인 최하층, ‘화이트 트래시’이자 ‘힐빌리’인 J.D.밴스가 변호사들과 미팅 전에 나누는 대화다.
밴스가 제 아무리 뛰어난 머리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세계 최고라는 예일대 로스쿨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명문 사립대가 아닌 주립대 출신이라는 건, 또 다른 면에서 능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교내 주요 서클에 가입하지 못한 것도 능력 부족이다. 화이트 와인의 종류와 ‘좌빵우물’을 몰라 식탁에서 쩔쩔매야 하는 것 또한 능력 부족이다.
이 정권을 뒤흔들었던 ‘조국 대전’ 당시 ‘내로남불’이나 ‘위선’보다 더 가슴 아팠던 건 “저 싸움도 결국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일 뿐”이라던, 어느 신문 기사의 한 줄이었다. 의대생들이 ‘전교 1등’ 운운했던 일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 여파일까. 능력, 자격, 공정을 다룬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평등의 역설’(사월의책)에 실린 독일 학자 요하네스 뵐츠의 글은 공정에 대한 요구가 어떻게 ‘타인에 대한 혐오’ 아니면 ‘자신에 대한 우울’로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엘리트 세습’(세종)을 쓴 대니얼 마코비츠는 능력주의 신봉자들을, 남뿐 아니라 자신마저도 파멸시키는 마약 중독자처럼 묘사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은 아예 원제가 ‘능력이라는 폭압’(Tyranny Merit)이다. 샌델의 TED 강연 ‘능력주의의 횡포’를 찾아봐도 좋다. 9분이 채 안 되는 이 강연에서 샌델은 성공에 대해 “내가 속한 사회가 내가 가진 재능을 알아보고 상을 준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은 치열한 학력 경쟁과 투자로 상징되는 명문대 이야기가 차지한다. 약간 불편할 수 있는 대목도 있다. ‘흑인이나 여성도 백인이나 남성만큼 능력을 갖췄다’라고 주장하려다 보니 정체성 정치가 되레 능력주의를 강화했다고도 본다. ‘여성’ 힐러리 클린턴과 ‘흑인’ 버락 오바마에 대한 극심한 반감, 그리고 ‘트럼프 현상’에 대한 고통스러운 진단일 게다.
여하간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쭉 따라가다보면 결국 한국에 가닿는다. 왜 안 그렇겠는가. 어느 연구자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10세기 고려 광종 때 과거제를 도입한 이래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지었던 역사가 무려 1,000년이 넘는 나라’ 아니던가. “아니 대체 시험 점수 외 무슨 기준이 있단 말인가”라는 목소리만이 오직 공정하다는 대한민국은 ‘능력주의의 오래된 미래’쯤 될까.
샌델은 현대 사회의 비극을 능력주의가 내포한 휴브리스(Hubris), 즉 ‘내가 노력해 내가 잘 됐으니 이 정도 대접은 당연하다’고 믿는 오만에서 찾는다. 오만의 대안은 겸손이다.
내일 수능이 치러진다. 입시가 다양화되면서 예전만큼은 아니라지만 수능은 여전히 한국식 능력주의의 큰 매듭 중 하나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렵게 치러지는 시험이기도 하다. 이 수능을 가능케 한 조건이 무엇인지, 수능 뒤에도 놓치지 않는 질문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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