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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우리 그림 속을 거닐다] 개미 요정과 고양이의 명랑한 모험-동양화가 신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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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우리 그림 속을 거닐다] 개미 요정과 고양이의 명랑한 모험-동양화가 신선미

입력
2020.11.28 11:00
수정
2020.12.01 11:22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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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미 작가는 한복을 입은 여인 그림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주인공들은 개미 요정과 고양이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본 신비한 존재에 대한 기억, 어린 시절 돌본 길고양이의 추억이 합쳐져 이들이 탄생한 것.

순수함을 상징하는 개미 요정과 고양이는 그의 초기작에서 '톰과 제리'같은 귀여운 앙숙이었지만, 지금은 엄마의 경험이 더해지며 인생과 가족에 대한 성찰로 확대되고 있다.


첫 그림책 ‘한밤중 개미 요정’ 원화와 함께한 신선미 작가. 고경원 대표 제공

첫 그림책 ‘한밤중 개미 요정’ 원화와 함께한 신선미 작가. 고경원 대표 제공


옛 그림에서 찾은 새로움

신선미 작가는 울산대 동양화과 때부터 구상화를 즐겨 그렸다. 추상화가 유행이던 시절이라 왜 구상화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심지어 "달력 그림 같다"는 말도 들었다. 사실적인 그림에 넘어 자신만의 스토리를 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기본기가 부족하다 느꼈다. 작가는 과감히 휴학을 결심했다.

"3학년 뒤 휴학하고 2002년 서울로 왔어요. 전통채색화 작가를 찾아가 아교 쓰는 법부터 종이 고르는 법까지 다시 배웠죠."

1년간 일주일에 사흘은 채색화를, 이틀은 수묵산수를 배우러 다녔다. 개미 요정 그림은 그 때 싹텄다.

"선생님이 화실에 늦게 오시는 날이 있어요. 그런 날은 그림 그리다 딴짓을 하거든요. 화실에 먼지 쌓인 중국 고서화 화집들이 많아서 넘겨보는데 당·송?원나라 그림들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섬세하고 색감도 아름다운데 그 시대만의 스토리와 판타지가 있더라고요.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이거였구나 싶었어요."

이때 본 그림이 임인발의 '장과견명황도'다. 당 현종을 알현한 도사가 모자함에서 조그만 나귀를 꺼내는 장면인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할 때 본 존재들이 떠오른 것이다. 엄마에겐 "몸이 허해서 헛걸 본 거야"라 타박만 들었지만, 그 때 그 세계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 건망증이 심했던 작가의 평소 습관까지 더했다. 작가가 잊어버린 물건들은 모두 개미 요정이 가져간 탓이라 봤다. 1년간의 연구생 생활을 마친 작가는 2004년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개미 요정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개미 요정은 어른에겐 보이지 않지만, 육감이 뛰어난 고양이에겐 존재를 들키고 만다. '당신이 잠든 사이8'(2008). 신선미 작가 제공

개미 요정은 어른에겐 보이지 않지만, 육감이 뛰어난 고양이에겐 존재를 들키고 만다. '당신이 잠든 사이8'(2008). 신선미 작가 제공


쫓고 쫓기는 개미 요정과 고양이

"처음에는 여인이랑 고양이만 그림에 등장했어요. 한복 입고 다소곳하게 있을 법한 여인 앞에 고양이가 나타나면서 코믹한 상황이 연출되죠. 그러다 고양이 눈에만 보이는 개미 요정이 등장해요. '건망증'이라는 그림이 개미 요정을 그린 첫 그림이에요. 작업실에 과자를 두었는데, 먹은 기억이 없는데도 사라진 적이 있었거든요. 그림 속 복주머니가 과자봉지이고, 개미가 꼬여서 하나씩 과자를 가져간 것을 개미 요정이 가져간 걸로 상상하며 그렸죠. 요정들이 저한테 장난친 건데 건망증인 줄 착각하고 있다는 설정이에요."

2006년 첫 개인전 때만 해도 주목을 못 받았지만, 2007년 한 아트페어에서 20여점을 완판시키며 화제의 신진작가로 떠올랐다. 시댁에서도 '그림 그리는 며느리'를 응원해준 덕에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다.

신선미의 그림은 진부한 소재로 취급받던 한복 입은 여인 그림에 판타지가 결합된 독특한 스토리텔링이 더해졌기에 인기다. 전통 회화지만 다소 이질적인 현대사회의 물품들이 나오고, 여기에 고양이와 개미 요정의 실랑이가 등장하면서 그림은 흥미진진해진다.

개미 요정에게 고양이는 무서운 존재다. 하지만 지략이 뛰어난 요정들이라 어수룩한 고양이를 손쉽게 골려 먹는다. 높이 쌓인 책더미를 쓰러뜨리거나 컵을 엎어 버리면, 개미 요정을 볼 수 없는 여인은 고양이만 혼내기 마련이니까.

초기의 한복 입은 여인 그림에서 파생된 일명 '한중일 시리즈'에는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 복식을 입은 여인들이 각국의 다도 문화와 전통 악기, 전통 부채 등과 함께 등장해 사랑받았다. 이 시리즈는 화장품 브랜드인 설화수를 비롯해 여러 기업과의 컬레버레이션으로도 이어졌다.


세수하는 여인과 그루밍하는 고양이의 닮은 점을 유쾌하게 포착한 '닮은꼴2'(2009). 신선미 작가 제공

세수하는 여인과 그루밍하는 고양이의 닮은 점을 유쾌하게 포착한 '닮은꼴2'(2009). 신선미 작가 제공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는 고양이

이쯤 되면 작가의 집에도 고양이가 있을 법한데 아직 없단다. 어린 시절 집 근처 길고양이를 돌보았던 기억, 친구네 집 고양이들을 보고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유통업을 하셨는데 창고에 박스도 많고 따뜻해서 길고양이 아지트가 됐어요. 처음엔 한두 마리씩 오길래 먹이를 줬더니 친구들을 데리고 오더라고요. 만져주면 저한테 몸을 문질러대곤 했어요. 그중에 얼굴 큰 고양이는 제가 귀찮았는지 경계하면서 등을 세우고 옆으로 걷더라고요. 근데 그 모습이 더 귀여웠어요."

어린 시절엔 튕기는 길고양이가 매력이었지만, 요즘은 곁에 와서 잘 안기는 고양이가 사랑스럽다. 친구네 집 고양이를 종종 보러 가는데, 곁에 와서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단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아는 듯한 고양이의 눈빛이 좋다.

고양이를 집에 들이는 걸 망설인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어릴 적 입양한 유기견을 사고로 잃었다. 그때 충격으로 먼저 떠나보내기 싫어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유독 고양이를 좋아해 내년에는 데려올 것 같다고.

"아이가 고양이 용품이랑 장난감은 자기가 사겠다며 벌써 용돈을 모으고 있어요. 엄마는 사료값이랑 병원비만 대 달래요. 어느 날은 각서를 출력해와서 사인해달라 하더라고요. 고양이 키우면 엄마가 뭘 하겠다는 각서인데 얼떨결에 사인했죠."


어린 아들이 엄마의 어린 시절과 만나는 순간, 고양이도 마법 같은 시간 속에 함께했다. '다시 만나다17'(2016). 신선미 작가 제공

어린 아들이 엄마의 어린 시절과 만나는 순간, 고양이도 마법 같은 시간 속에 함께했다. '다시 만나다17'(2016). 신선미 작가 제공


엄마이자 딸의 경험 담은 그림책

개미 요정의 판타지가 중심인 그림 같지만, 최근 작품엔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간다. 임신, 육아, 모성애, 그리고 연로하신 친정엄마를 보는 딸의 소회가 잔잔히 스며들었다. 그림 속 메시지를 어른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그림책 작업도 했다. 어린 아들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만난 개미 요정 이야기를 그린 '한밤중 개미 요정'(2016), 나이 드신 엄마가 요술 장옷을 입고 딸과 함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개미 요정의 선물'(2020)이다.

'한밤중 개미 요정' 속 남자아이는 2009년 태어난 작가의 아들이고, 한복 입은 여인의 포즈 역시 모두 작가가 직접 취한 것이다. 포즈 사진은 남편이나 아들이 찍어준단다. 그림책 크기에 맞추는 게 아니라 평소 전시 때처럼 크게 그렸기에 첫 그림책 때는 스케치 1년에 완성까지 2년이 걸렸다. 채색에 드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분채를 쓰는데 종이 느낌을 살리면서 염색되듯 색이 올라오려면 다시 칠하고 말리길 반복해야 한다. 붉은색을 내고자 하면 노랑부터 시작해 주황, 양홍, 빨강 순으로 칠한 뒤 말리기를 스무번 이상 반복한다. 그렇게 해야 색이 단단하게 종이에 먹어들어가면서 오묘한 느낌이 난다고.

"초기작에서는 개미 요정이 장난치면 고양이가 잡으러 가기 바빴다면, 아이가 등장하면서 개미 요정은 친구가 되기도 해요. 순수한 아이는 요정을 볼 수 있다는 설정이거든요." '태교 시리즈'를 보면, 엄마가 잠들어 있을 때 개미 요정들이 태동을 듣고 있거나 건강하게 자라라고 기원하는 느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두 번째 그림책 '개미 요정의 선물'에서 투명 장옷은 친정엄마를 과거로 데려다준다. 신선미 작가 제공

두 번째 그림책 '개미 요정의 선물'에서 투명 장옷은 친정엄마를 과거로 데려다준다. 신선미 작가 제공


치유를 주는 그림책 작업 병행하고파

'개미 요정의 선물' 속 할머니는 작가의 친정엄마다. 치매인 아빠를 돌보느라 힘들어진 엄마마저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자 엄마와의 추억을 책으로 남기고 싶었다. 첫 그림책이 아이를 위한 육아일기라면, 두 번째 책은 엄마께 바치는 선물이다. 그래서 그림책 속에서 작가와 엄마는 투명 장옷을 입고 과거로 떠난다. 이 여행에 따라 나선 고양이도 함께 어려진다.

화가가 그림책 작업도 하는 걸 '외도'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작가는 그림책 작업도 꾸준히 하고 싶다 했다. 엄마로서의 경험이 그림에 반영됐듯, 내년에 고양이를 입양하게 되면 새 가족인 고양이에 관련된 경험이 다음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할 것이다. 다음 책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한층 비중 있게 등장할 고양이의 모습이 벌써 궁금해진다.

글=고경원
고양이 전문 출판사 야옹서가 대표, 18년차 고양이 작가.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2007)를 시작으로, 여행기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2010), 인터뷰집 '작업실의 고양이'(2011), 사진에세이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2013), 사진집 '둘이면서 하나인'(2017)을 썼다. 2009년 9월 9일 '한국 고양이의 날'을 창안해 고양이 인식 개선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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