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사유리씨의 자발적 비혼 출산 소식을 두고 우리 사회의 반응이 뜨겁다. 한국에서 아기를 낳고 싶었지만 불가능해, 마지못해 일본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에 많은 이들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시술을 통한 비혼모의 출산은 국내법상 가능하지만 실현은 어렵다. 의학계의 윤리지침에서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화제가 된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혼인관계를 맺고 자녀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이른바 '정상가족'의 형태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제도적 인식에 대해 생각할 지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공론장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은 주로 여성의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 가족 형태의 다변화, 저출산 정책의 실효성과 방향성 등 우리사회와 여성학계가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주제들로 보인다. 논의의 쟁점이 깊어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태어나는 아이의 생각, 의사, 감정, 의도 같은 것들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일까? 전통적 정상가족의 가치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도,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인정하라고 외치는 진보주의자도 모두 어른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뿐, 태어나는 아이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낳아 주는 것만으로 부모의 은혜가 하늘 같다고 배우지만 태어난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독립적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충분한 보호와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비롯된 논의에서 출생권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없다. 중고거래 장터인 당근마켓에 36주 된 아기를 내놓는다는 글이 우리사회에 던진 충격이 무색해질 정도다. 오히려 익명으로 출생신고를 하는 보호출산제 이야기까지 나온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부모가 되거나, 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지만 원치 않게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 어머니에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의 권리는 누가 지켜줄까?
이제는 출생권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어른의 입장(임신, 출산, 양육)만이 아닌 아이의 바람(가족구성과 사랑, 권리)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고 가는 지금의 논의는 공허하기 그지없다.
이희영 작가의 소설 '페인트'는 아이들이 면접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부모를 선택하는 세계를 그린다. 이런 설정은 어른들의 욕망과 권리에 가려져 태어나고 자라는 모든 순간을 통틀어 언제나 객체로 머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처지를 눈앞으로 소환한다.
어떤 아이도 스스로 선택해서 이 거친 세상에 오지 않는다. 철저히 어른의 선택으로 삶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혜와 슬기가 모여야 할 곳은 아이들이 행복하고 올바르게 양육, 성장 할 수 있는 '환경과 가족의 형태'를 제공해 주는 일이다. 여성의 출산권도 중요한 권리이지만 '자유의지의 남용'이란 측면도 가진 양날의 칼이다. 이러한 논의와 함께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균형도 필요하다.
탄생의 축복은 누구나에게, 삶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모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가정과 사회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아이의 행복추구권, 최소한의 장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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