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한 내년도 예산안(555조8,000억원)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새로 넣어달라”고 정부에 요구한 도로ㆍ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규모가 2조원에 가까운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정부가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사업성 부족' 등의 이유로 배제한 지역 민원성 사업이 ‘예결위 요청 사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기사회생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내년도 본예산 또한 국회 심사를 거치며 ‘총지출은 깎이고, SOC 예산은 늘어나는’ 현상이 반복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예결위원 OOO 요청', 정부 퇴짜 맞고 예결위서 환생한 지역 SOC
한국일보가 예결위의 국토교통위원회 소관 예산안 심사자료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여야 예결위원(50명)이 신규로 예산 반영을 요구한 SOC 사업은 133개, 1조7,000억원 규모로 집계됐다. 이 같은 국회발(發) 예산에는 지역별 역점 사업이 고루 포함됐다. 서동용 민주당 의원(전남 순천ㆍ광양ㆍ곡성ㆍ구례을)은 광주 송정역 고속철도(KTX) 역사를 증축하는 예산 200억원을 요청했다. 광주시가 “200억을 국비로 지원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거부되자, ‘호남 예결위원 요청사업’ 꼬리표를 달고 상정됐다.
민주당 박재호(부산 남구을) 의원이 255억원을 요구한 부산 부전역~마산역 복선전철 구간(50.3km) 전동 열차 도입 건 또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조 복심’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최근 기재부에 이 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기에선 김한정 민주당 의원(남양주을)이 요청한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인천~안산 구간’(454억원) 사업이 상정됐다. 경북에선 구미 국가산업단지 제5단지에 임대전용산단(33만㎡)을 조성하는 예산 346억원이 국민의힘 김형동(경북 안동ㆍ예천)ㆍ추경호(대구 달성군) 의원’ 명의로 올라왔다. △호남선 KTX 논산~가수원 구간 고속화(50억원ㆍ충남 천안병 이정문) △제주 중앙버스전용차로 건설(47억원ㆍ제주 서귀포 위성곤) △울산 수소전기차 안전인증센터 (45억원ㆍ울산 중구 박성민) 등도 상정됐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예산소위가 열리면 제주ㆍ강원 지자체 예산은 예결위원 A가, 경기도는 B가 챙기는 식으로 분담이 이뤄진다”고 했다.
“일단 삽 뜨고 보자”… SOC ‘알박기’ 예산도 많다
기초설계 등에 필요한 비용만 소액으로 편성했다 이듬해부터 본격 예산을 확보하는 이른바 ‘미끼 예산' '문지방 예산'도 대거 포함됐다. 예결위 신규 SOC 사업 133개 중 사업 설명에 ‘설계비’ ‘용역비’ 등이 포함된 사업은 73개(55%)에 달했다. 민주당 오기형 의원(서울 도봉을)은 서울 도봉차량기지 복합물류센터 예비타당성조사 용역비로 10억원을 요구했다. 같은 당 김원이 의원(전남 목포)은 전남 영암 훈련용 항공기 비행장 개발 용역비로 20억원을 상정했다. 수백~수천억원이 투입되는 SOC 사업은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계속사업으로 분류돼 이듬해 후속 예산을 따내기가 수월하다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쪽지 예산’보다는 진일보했지만…
물론 국회발 신규 예산이 전부 ‘낭비성’은 아니다. 지역 발전 차원에서 우선 순위가 높은 사업인데도 정부가 예산안에서 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법이 허용한 방식이기도 하다. 국회 예결위원장과 간사, 정권 실세 의원 등이 상임위ㆍ예결위를 거치지 않고 소(小)소위 같은 비공식 회의에서 지역구 예산을 밀어 넣는 ‘쪽지 예산’ ‘카톡 예산’ 등 초법적 관행보단 원칙적으로 낫다.
그럼에도 우려는 여전하다. 예결위 사정에 밝은 국회 관계자는 “정부에서 퇴짜 맞고 예결위에 다시 올라온 사업은 사업성이 떨어지는 등 문제 사업들이 많다”며 “정부안에 담겼다가 국회를 거쳐 증액된 사업은 증액 배경이 기록에 남지만, 신규 사업들은 확정돼도 정부가 왜 편성에 동의했는지 근거가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예산 전문가는 “예결위원들이 신규 요청한 예산 중 유독 지역 민원성 SOC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국회의 과도한 SOC 사랑이 전체 예산 배분의 효율성을 해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2011~2020년 국회가 확정한 SOC 예산은 정부안보다 매년 수천억씩 증액됐다. 반면 이 기간 전체 총지출은 매년 정부안보다 감소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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