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기부 5분의 1로 뚝...온기 사라진 '마지막 달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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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기부 5분의 1로 뚝...온기 사라진 '마지막 달동네'

입력
2020.11.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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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에 남은 노인들
코로나19로 연탄 끊기고 공중목욕탕 폐쇄
재개발 앞두고 주민도 3분의 1로 줄어 쓸쓸

지난 18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의 인적이 드문 골목길. 비가 잠시 그친 틈을 타 주민 두 명이 스티로폼과 방석을 깔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 때는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지만 이젠 두어명이 모이는 게 고작이다. 최다원 기자


“연탄이 없어 큰일이여. 안 그래도 사람도 줄어 쓸쓸헌디.”

가을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던 지난 1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의 골목길. 몰려드는 주민들로 한때 ‘백사마을 사랑방’으로 불렸다는 골목 안 집 앞에도 주민 발길이 뚝 끊겼다. 간간이 문턱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가는 어르신들이 있긴 했지만, 근심이 적지 않은 듯 한숨만 푹 내쉰 채 이내 자리를 떠났다. 주민 강모(80)씨는 “이웃도 줄었는데 올해는 외지 사람들도 잘 보이질 않는다”며 “연탄도 떨어지고, 곧 눈도 쌓일텐데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백사마을이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맞게 됐다. 재개발 계획으로 대다수 주민이 마을을 떠난 상황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도움의 손길마저 끊긴 탓이다. 백사마을은 1967년 정부가 용산, 청계천 등 판자촌을 강제 철거하며 내몰렸던 이들의 터전이 돼 준 곳으로 이맘때면 겨울 나기 준비로 시끌벅적했지만, 올해는 마을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코로나19로 올해 연탄 기부 5분의 1로 뚝…봉사자도 절반 줄어

한 백사마을 주민 집 앞 연탄통이 다 쓴 연탄 자국만 남은 채 비어있다. 최다원 기자


수십년 간 이어져 온 연탄 후원 및 나눔 손길이 올해는 눈에 띄게 급감했다. 2004년부터 백사마을에서 연탄 나눔 사업을 도맡고 있는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에 따르면 올해 연탄 후원량은 92만장으로 지난해(486만장)와 비교해 5분의 1토막 났다. 연탄 배달에 손길을 보태겠다는 자원봉사자 또한 상반기 기준으로 예년의 54% 밖에 안 된다. 모금액이 더 모이면 연탄을 배달해주겠다며 지난 9월 주민들에게 나눠준 ‘약속 쿠폰’도 교환을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백사마을 주민 대다수는 여전히 연탄으로 방과 물을 데우기 때문에 연탄이 부족하면 혹독한 겨울을 날 수밖에 없다. 주민 장모(80)씨는 “예전엔 연탄을 받을 때 한 번에 수백장씩 들어왔는데 이번엔 50장씩밖에 못 받았다”며 “아껴서 쓸 생각하면 막막하다”고 했다. 실제 이날 골목골목에 놓여진 연탄 보관통은 거뭇한 연탄 가루만 남은 채 텅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15년 넘게 백사마을의 ‘온기’를 책임진 연탄은행 활동가들도 애가 타긴 마찬가지다. 지난해엔 3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한 ‘성탄데이’ 행사도 올해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됨에 따라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허기복 연탄은행 대표는 “후원과 자원봉사 일정으로 빽빽해야 할 다이어리가 텅 비었다”며 “올해 목표인 250만장을 채울 수 있게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2016년부터 백사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목욕 터가 돼줬던 비타민 목욕탕의 문이 닫혀있다. 입구엔 ‘코로나19로 인해 관계자 외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연탄은행 활동가는 “하루 평균 5~10명 정도 목욕탕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최다원 기자

온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백사마을 주민들을 위해 연탄은행이 2016년 마련한 무료 공중목욕탕도 5개월 넘게 운영을 멈췄다. 코로나19 확진자 규모가 줄었다 늘기를 반복하며 재개장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태다. 주민 곽모(89)씨는 “목욕탕도 닫고 연탄도 부족하니 이제 고양이 세수만 해야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마을에서 쌀집을 운영했다는 김모(84)씨는 “목욕탕이 열 때는 다리 아픈 아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뜨끈한 물에 지지며 버텼는데 이젠 못 한다”며 혀를 찼다.

"다 떠났어" 남은 건 노인뿐…재개발 앞두고 마을 곳곳 텅 비어

비탈길에 깔린 낙엽들이 비 때문에 한껏 미끄러워져 있다. 대충 쓸어 중앙 길을 터놓긴 했지만, 난간을 잡아도 함부로 발을 딛기 조심스럽다. 최다원 기자


소수 주민만 남은 백사마을 환경은 정비할 인력이 없어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재개발이 결정된 2009년 당시 700가구가 이곳에 살아 북적였지만, 서울시가 이주 시한으로 정한 2022년이 다가오며 현재는 200가구만 남아 있다. 남은 주민도 고령의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가파른 경사지에 차곡차곡 쌓이는 은행잎을 치울 사람이 없어 허리 펴기도 힘든 80대 할머니 몇몇이 떠난 사람들을 대신해 빗자루를 들고 있다.

무엇보다 주민들은 남은 1년여 기간 동안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마을 곳곳에서 만난 주민들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아직까지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집 앞 골목길에 길 고양이 사료를 놓던 한 노인은 “돈이 있어야 이사를 가지, 올해는 이사할 생각도 여력도 없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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