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반 만에 1심 결론... 공단 측 청구 모두 기각
"흡연피해 관련 보험급여 지출은 감수할 불이익"
이번에도 '흡연-암 발병 인과관계 입증'은 실패
공단 "담배회사에 또 면죄부"... 항소 가능성 시사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흡연 때문에 발생한 피해를 배상하라’며 지난 2014년 국내외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낸 500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 6년 반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나온 결론이지만,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며, 암 발병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던 과거 대법원의 판단을 또다시 넘지 못한 셈이다. 다만 공단 측이 항소 가능성을 시사한 만큼, 향후 상급 법원에서 담배회사의 책임 문제를 둘러싼 공방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공단은 흡연의 직접 피해자 아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부장 홍기찬)는 20일 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브리티쉬아메리칸토바코(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원고가 요양기관에 보험급여 비용을 지출하는 건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징수하거나 지원받은 자금을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보험급여 지출로 재산 감소나 불이익을 입었다 해도 공단의 법익이 침해됐다고 볼 순 없다”고 밝혔다. ‘흡연’과 관련한 공단의 보험급여 지출은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며, 따라서 공단은 손해배상을 구할 ‘직접 피해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지난 2014년 4월 공단은 KT&G 등을 상대로 “흡연 때문에 추가 부담한 진료비를 물어내라”면서 533억여원의 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청구액은 흡연과의 인과성이 큰 3개의 암(폐암 중 소세포암ㆍ편평세포암ㆍ후두암 중 편평세포암) 환자들 가운데, ‘30년 이상 흡연’과 ‘20년간 하루 한 갑 이상 흡연’의 조건을 충족하는 환자 3,465명에게 공단이 2003~2013년 보험급여로 지출한 액수로 산정됐다.
공단의 소송 당사자 자격 문제와는 별개로, 또 다른 핵심 쟁점은 △흡연과 암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 △담배의 설계ㆍ표시상 결함 여부였다. 특히 공단은 2015년 5월 암환자 3,400여명의 개별 흡연력과 급여비 내역 등을 총정리한 자료를 입증 근거로 제출하는 등 ‘인과관계 입증’에 주력했다. 그러나 법원은 공단 측 자료만으로는 ‘흡연과 암 발병’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인과관계 인정을 위해선) 환자들이 흡연에 노출된 시기와 노출 정도, 생활습관, 가족력 등에 대한 조사로 흡연 이외 다른 위험인자가 없다는 걸 추가 증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담배 설계·표시상 결함" 주장도 기각
‘설계상 결함’ 주장도 법원에서 기각됐다. 공단은 재판 과정에서 “피고들의 담배 제품들은 극도로 유해하고 중독성이 있어, 안정성이 결여된 제조물” “니코틴ㆍ타르 등을 줄일 방법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 등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재판부는 “담배 연기에 포함된 니코틴과 타르의 양에 따라 담배의 맛이 달라지고, 담배 소비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맛과 향을 가진 담배를 선택하여 흡연하는 것”이라면서 ‘설계상 결함’으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표시상 결함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담배회사들이 이미 국민건강증진법과 청소년보호법 등 관계 법령에 따라 유해성에 대한 경고 문구ㆍ청소년 판매 금지 문구 등을 표시하고 있으므로, 추가적인 설명이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국내에서 담배의 유해성ㆍ중독성을 이유로 담배회사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 사례는 없다. 지난 1999년 흡연 후 암에 걸린 환자들과 가족 등 30명이 KT&G와 국가를 상대로 첫 담배 소송을 냈으나, 15년 후인 2014년 대법원에서 원고패소가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인과관계 입증이 충분치 않다’ ‘흡연 시작은 물론, 흡연의 계속 여부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문제’ 등의 이유를 들어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날 선고 후 공단은 “(법원이) 담배 회사에 또 한번의 면죄부를 줬다”며 “판결문의 구체적인 내용을 앞으로 면밀히 분석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김용익 공단 이사장도 “대단히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판결”이라면서 “항소 문제를 포함해서 담배의 피해를 밝혀나가고 인정받는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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