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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공기'를 쓰는 복화술사로서의 소설가

입력
2020.11.19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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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장욱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편집자주

※ 한국일보문학상이 53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이장욱 작가. 문학동네 제공

이장욱 작가. 문학동네 제공


언젠가 소설집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에 대해 글을 써야한다면 '복화술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단편이 선사하는 점입가경의 감흥이 그만큼 예외적이었다. 가령 화자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에 주목한다면 그러지 않기가 오히려 어렵다. “복화술은 배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를 둘러싼 세상의 공기를 몸 깊은 곳에 모아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 그런데 복화술사를 둘러싼 대기 전체에 음울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곳이라면? 글쎄요.”

여기서 말하는 ‘복화술사’가 소설가의 은유일 수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복화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세상의 공기”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화자의 아버지가 펼친 1980년대 복화술 거리공연 장면이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항쟁의 비극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어느 겨울, “광주의 충장로우체국 앞”에서였다. 화자의 아버지는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를 구연하다 산신령이 등장해 나무꾼을 만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웃음이 터져야 할 대목”에서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구경꾼과 행인들이 함께 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희극이 아니라 비극을 공연하는 복화술사라는 것이 가능할까요?”라고 화자는 짐짓 묻지만 희극과 비극을 구획하는 것은 복화술사(소설가)의 표현 자체가 아니라 어쩌면 “세상의 공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소설은 전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공기”가 울고 있었으니 “그 울음바다를 아무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복화술사 삼대(화자의 조부도 일제시대에 복화술사였다)가 정치나 권력이나 역사라고 불려온 것과 상관없는 듯 살아온 존재들이라고 해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 하위자니 소수자성이니 하는 개념부터 덥석 들이댈 일은 아니다. 남용하면 안 쓰느니만 못한 이 “현대적 클리셰”들을 진작 비껴난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복화술(腹話術)이 아니라 “겹 복 자를 써서 복화술(複話術)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라는 화자의 말마따나 그들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개의 목소리를 지녔다.

“의도와 관계없이 튀어나오는 그것, 스스로 발생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그것, 그 목소리”들이 질병의 징후나 기술연마의 산물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며 “생명의 문제”라는 데 이르면 왜 이 소설집에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운, 그래서 ‘진실’을 대변하지 못하는 일인칭 화자들이 반복해 등장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의 공기”는 일인칭 ‘나’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여러 번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국 ‘나’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공기”를 쓴다.


강경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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