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미 화가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코로나 블루가 화두로 떠올랐다. 그 회색빛 틈을 비집고 희망을 전달하는 화가가 있다. 봉황의 기운을 전하는 해피바이러스 신경미 씨. 그녀는 오랜 무명을 떨치고 찬란한 날개짓을 시작했다.
봉황은 상서롭고 아름다운 전설의 새다. 수컷은 봉, 암컷은 황이라 하여 암수 한쌍을 봉황이라 한다. 부부 금슬뿐만 아니라 자손 번창과 복이 따른다고 알려져 있다. 신씨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며 봉황을 소재로 작업을 한다. 그녀의 봉황은 활기차고 기운이 넘친다. 동양의 정서를 서양화 기법으로 녹여 냈다. 힘찬 터치와 화려한 색채, 입체적이며 묵직한 중량감이 시선을 압도한다.
신씨는 여성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주로 대작을 작업한다. 100호짜리 10개를 연결해서 1,000호 작품을 만든다. 지난해, 대구 달서구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에서 100호 20점과 3m 대작 3점 등 총 147점을 선보였다. 100호 작품에 1,500만원 상당의 무궁화 조각액자(김순태 작)를 끼우고, 봉황에 순금을 바르기도 한다. 올해 제38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맡았다. 지난 10월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0 경주블루아트페어'에는 8m 대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엄청난 양의 물감과 돈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신씨는 전남 고흥 출신이다. 어린 시절 모래밭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고 덮고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녀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었기에 자연스레 화가의 꿈을 키웠다. 옆 동네에 사는 천경자 화백을 흠모하며 화풍을 사숙했다. 경상도 남자의 성실함에 반해 대구로 시집왔다. 이후 종갓집 맏며느리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 무명의 화가로 녹록지 않은 삶을 꾸려왔다. 그림을 그리는 20여 년간 집문서 3개가 들어갔다고 한다. 6년간은 팔공산에서 삭발하고 작업실에만 머문 적도 있었다. “팔공산에 가면 미친 여자가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고집과 아집으로 버티며 죽기 살기로 그렸습니다. 돈이 생기면 오로지 봉황 그리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봉황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어느 박물관에서 루비 30개를 주며 봉황 그리는 데 쓰라고 했습니다. 사양했지만 제 그림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일만이 저를 성원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일 것입니다.”
신씨의 봉황이 수면 위로 떠 오른 것은 불과 3년 전이었다. 캔버스가 있으면 물감이 없고 물감이 있으면 캔버스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한이 되어 물감을 마음껏 쓰는 편이다. 밑그림만 그려도 무게가 묵직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화실에 150개 정도의 캔버스가 쌓여있다. 밥을 안 먹어도 포만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사람들이 삼시 세끼 밥을 먹듯,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을 하듯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또 다른 사생활이 있다. 그림 그리는 시간만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봉사활동이다.
2014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초대전과 퍼포먼스 제안을 받았다. 한·독이 하나 되는 봉황 퍼포먼스였다. 1년 반을 연습했다. 행사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참석했다. 지난 시절 서독으로 간 광부와 간호사의 아픔과 한을 가슴으로, 몸짓으로 풀어냈다. 참석한 외국인들도 눈물을 흘렸다. 2014년부터 2016까지 3회에 걸친 경주 문무대왕 추모예술제 등 지금까지 10회의 퍼포먼스를 했다. 대부분 사비를 들여서 한다. 캔버스와 광목, 먹과 단지, 한복, 큰 붓 등 모두 1회용으로 사용하고 불태운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즉흥적인 몸짓이 아니라 연습과 반복의 결과물이다.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결전의 날까지 몸을 유연하게 만들고, 눈을 감고도 봉황을 그릴 수 있도록 수천 번을 그리고 연습했다. 오른손잡이인데 팔을 너무 써서 마비가 왔다. 왼손으로 그렸고 이제는 양손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현장 퍼포먼스는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자 노동입니다. 내 키보다 더 큰 붓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리고, 기운을 불어넣다 보면 봉황이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오르죠.”
신씨는 2000년부터 열린장애인협회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대구수성구 노인정, 세바퀴봉사단, 대구시 지체장애인협회 달서구지회, 더봄 발달장애인복지협회 등에서 꾸준히 몸봉사와 재능기부를 이어오고 있다. 그림을 팔면 수익의 일부는 기부한다. 힘든 시절, 그림을 그리며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고 있다.
화가에게 50대는 만개의 시기와도 같다. 준비된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화가들은 단명한 경우가 많다. 모딜리아니, 고흐, 심사임당, 이중섭, 박수근 등이 그러했다. 신씨는 “그림에도 에너지가 있어 감기로 7일을 고생하면 힘에 부쳐서 100호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고 했다.
“봉황이 내게 날아와 준 것은 행운이자 축복입니다. 살아있는 날까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체력을 다지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술가는 가족의 희생이 뒤따릅니다.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예술가의 몫은 좋은 작품을 남기는 일입니다.”
신씨는 11일부터 15일까지 대구엑스코에서 열리는 대구아트페어에 참여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