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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맛 알아가는 예비 중학생

입력
2020.11.14 08:0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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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한 상인이 고춧가루를 옮기고 있다. 뉴스1

8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한 상인이 고춧가루를 옮기고 있다. 뉴스1


얼마 전 집 근처에서 맛이 괜찮은 코다리(반건조 명태) 식당을 발견했다. 식구들 모두 생선을 좋아하는 터라 열흘 새 세 번이나 가서 같은 메뉴를 시켰더니 홀 담당 아주머니가 우릴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아주머니가 우리 식구를 쉽게 기억한 건 아이 때문이었다. 그 집 코다리 조림은 고추와 고춧가루가 꽤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어른이 먹기에도 상당히 맵다. 그런데 초등학생이 공기밥 두 그릇을 시켜가며 코다리 접시를 싹 비웠으니 기억에 남을 만했다.

올해 들어 아이가 부쩍 매운 맛을 찾는다. 자주 가는 떡볶이 가게에선 매운 정도를 7단계로 구분해 놓는데, 주문할 때마다 번번이 아이랑 실랑이를 벌인다. 높은 단계로 맵게 시켜보자는 아이의 주장과 1단계로도 충분하다는 엄마의 고집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느라 늘 시간이 간다. 순댓국에 매운 양념을 티스푼으로 가득 넣질 않나, 국숫집에선 젓가락 들기 전에 고춧가루부터 찾는다.

과학적으로 따져 보면 사실 매운 맛은 사람의 생존에 필수는 아니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이 단맛이나 짠맛에 끌리는 건 모두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단맛을 찾도록 진화한 이유는 단맛을 내는 성분인 탄수화물을 꼭 섭취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탄수화물이 몸에 들어오면 분해돼 포도당 형태로 흡수되고, 포도당은 체내 곳곳에서 에너지를 내는 데 쓰인다. 세포가 생리작용을 하거나 뇌가 각종 신경신호를 보내기 위해선 나트륨 같은 미네랄이 필요한데, 짠맛을 내는 소금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성분이 바로 나트륨이다.

사람들이 감칠맛에 끌리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감칠맛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단위 물질(아미노산) 중 하나인 글루탐산이 낸다. 감칠맛이 나는 음식은 단백질이 많아 영양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되니 이를 섭취하는 게 생존과 진화에 유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과 달리 매운 맛은 인체에겐 오히려 고통이다. 다른 맛들은 모두 혀에 분포해 있는 미각세포가 감지하는데, 매운 맛은 통각세포가 포착한다는 사실은 이제 많이 알려졌다. 고추나 고추냉이, 후추, 마늘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 시니그린, 피페린, 알리신 같은 성분이 통각세포를 통해 감지되면 인체는 이를 높은 열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위험 신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매운 걸 먹을 때 심장은 박동이 빨라지고 피부에선 땀이 나게 된다.

그런데도 인류가 오래 전부터 매운 맛을 즐겨온 이유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다. 주로 더운 나라에서 매운 향신료가 많이 쓰인다는 점을 근거로 음식을 미생물로부터 지키려는 목적이었을 거란 추측이 있다. 또 통증 같은 위험을 생명에 큰 지장이 없는 선에서 최대한 즐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매운 맛을 참고 먹으며 고통을 이겨냈다는 쾌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매운 음식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매운 맛을 얼마나 오래 참는지를 놓고 대결을 벌이는 모습이 종종 연출되는 걸 보면 이런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공감이 가는 이유는 스트레스 해소다. 맵다는 ‘통증’을 감지하면 뇌는 진통 작용을 하는 물질인 엔도르핀을 내보내 통증을 줄여주고 행복감을 높여준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고민이나 스트레스를 잊고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스트레스가 많을 때 매운 음식이 당기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부모 찬스’가 만드는 사회의 불평등과 갑작스럽게 닥쳐온 전염병 때문에 온 나라가 스트레스에 시달린 작년과 올해 식품과 외식업계를 중심으로 매운 맛 열풍이 이어진 걸 보면 설득력 있다.

며칠 전 아이의 중학교 배정 원서를 썼다. 내년부터는 아이의 일상이 참 많이 달라질 터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대화하다 보면 ‘중학교 가면 어때야 한다는데’, ‘중학교 가서도 그러면 안 된다는데’ 하는 걱정들이 수시로 오간다. 벌써부터 스트레스다. 하물며 아이는 어떨까. 처음 겪게 될 중학교 생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더 불확실해졌는데,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학습 부담은 그대로 늘어만 간다. 녀석이 그래서 자꾸 매운 맛을 찾나 싶다.

퇴근한 뒤 아이 책상에서 ‘자유학년제와 중학교 평가에 대한 처음 안내’라는 제목의 안내장을 봤다. 교육청이 예비 중학생용으로 제작한 걸 학교에서 나눠준 모양이다. 입학하기도 전에 평가 방법부터 알아야 하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다음날 아침에 먹을 콩나물국을 끓이며 안내장을 읽어 내려가다 국에 고춧가루를 한 스푼 더 넣었다.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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