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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후하고 피해자엔 박한 판결

입력
2020.11.11 06: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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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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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2부는 농민 박모씨 등 1만8,000여명이 13개 비료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비료회사들이 공동해 총 39억4,3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농민들이 비료값을 담합한 비료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무려 8년 만에 내려진 1심 판결이다. 이번 판결은 독과점에 따른 소비자들의 집단피해를 배상하라는 판결로서 평가될 수 있지만 동시에 현행 독과점 피해 구제제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판결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소송의 발단은 공정위가 2012년 4월 비료 제조업체 16곳이 16년여간 농협이 발주하는 비료 구매 경쟁입찰에서 낙찰 물량과 입찰 가격을 담합한 사실을 적발하고 총 830억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일부 비료회사가 이 과징금처분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2014년에 대법원이 과징금처분의 정당성을 확인하면서 그대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들인 농민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은 과징금처분이 확정된 이후로도 무려 6년이나 걸려 1심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게다가 배상금액도 수백억 원대의 과징금 액수에 크게 못 미치는 수십억 원대에 불과하다. 물론 이 소송 이외에도 피해 농민들이 제기한 소송이 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 판결에 준하여 판결이 내려질 경우 배상액 원금은 100억원을 크게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농민 피해 사건에서 국가는 과징금으로 830억원에 가까운 과징금을 재빠르게 징수하였는데 정작 피해자들은 소송에 참여한 극히 일부에게만 8년 만에 쥐꼬리만 한 배상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더구나 법원은 감정인의 감정 결과와 구매 내용 등 자료의 제출을 통해 인정된 손해액에다가 ‘손해의 공평 타당한 부담이라는 손해배상제도의 이념’을 감안하여 50%의 감액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담합행위에 따른 손해 배상 책임을 50%나 감경해 주는 것이 과연 손해배상제도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손해배상제도의 주된 목적은 피해의 변제이고 불법행위의 예방이지 불법 행위에 따른 피해를 가해자와 피해자가 적당히 분담하라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의 경우에는 담합과 같은 독과점행위에 대해서 실 손해액의 3배를 배상하도록 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징벌적배상제도가 속속 도입되고 있는데 실제 손해조차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감경하는 법원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미국에서는 판결까지 갈 경우 막대한 배상판결이 내려질 것을 우려하여 기업들이 조기에 화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기업 입장에서 소송을 질질 끌수록 유리한 데다가 사회적 비난이 잦아들면서 법원이 친절하게 감액까지 해 주므로 집단 피해 사건에서의 늑장판결, 쥐꼬리 배상은 일반화된 현상인 듯싶다.

최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집단소송법안은 담합 등 독과점 사건도 집단소송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소송 전 증거조사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국민참여재판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이번 비료값 담합 사건은 이런 법 제정의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독과점 피해 사건에서 정작 다수의 피해자들은 배상받지 못하고 국가만 막대한 과징금을 거두어 가는 현실은 분명 개선되어야 한다.



김주영 변호사ㆍ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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