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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의외의 순간에 우리를 붙잡아두는 소설

입력
2020.11.10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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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준영 '사치와 고요'

편집자주

※ 한국일보문학상이 53번째 주인공 찾기에 나섭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이달 하순 발표합니다.


기준영 작가.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천희

기준영 작가.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천희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설에 관해 말할 때는 그 말을 아끼고 싶지 않다. 아름답다는 말 외에 다른 수식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야말로 소설 안의 요소들이 연쇄적인 파장이 되어 움직이는 이미지를 정확히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아름답다는 추상적인 형용사는 하나의 소설에서 매번 구체적인 의미가 되어 느리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기준영 소설집 ‘사치와 고요’는 내게 아름다운 책이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상대가 보여주려는 모습 이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의 영역을 억지로 침범하지 않고 굳이 부담 지우지 않는다. 이를테면 ‘마켓’에서 시연은 자연유산했다는 진단을 받지만 남편에게 자신의 고통을 일일이 설명하거나 위로를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하루’에서 주현과 민규는 소개팅으로 만나지만 사랑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가지지 않으며 서로의 과거를 무리하게 캐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누군가를 원하지 않거나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각자의 비밀을 조용히 품은 채로 묵묵히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소설의 어느 지점에서 이들은 다른 사람과 아주 깊이 연결된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은 대체로 느닷없거나 환상적이거나 미래와 뒤섞여 있다. 이를테면 ‘마켓’에서 시연은 이혼을 결심하지만, 혼자 물 위에 떠있는 채로 버거워 하는 시연에게 저 멀리에서부터 닿으려 애쓰는 꿈을 꾸었다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기준영 '사치와 고요'

기준영 '사치와 고요'


‘완전한 하루’에서 주현은 민규가 형수와 사랑에 빠져 함께 와이오밍으로 도망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후, 사무실에 들어온 강아지를 비에 젖은 아기 사슴으로 착각하고 무언가를 깨닫듯 웃음을 터뜨린다. ‘들소’에서 초등학생 소녀 푸름은 응급실에 실려가 학예회에 오지 못한 아름다운 소년 길우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고는, 사십대가 된 길우와 자신의 미래가 떠오르며 어마어마한 진동을 내는 들소가 돌진해오는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존재가 인생으로 들어오는 순간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 이제 사랑하게 될 사람의 소중함은 소리 없이 쌓이다가 터져버리듯 갑자기, 환상 속에서 나타난 사슴과 같이 거짓말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뒤엉켜진 채 들소처럼 한꺼번에 몰려온다.

기준영의 소설은 그 아름다운 의외의 순간에서 멈춘 다음 우리를 붙잡아두고 오래 머물게 한다. '들소'에서 학예회에서 등을 펴고 당당하게 나무 역할을 해내라는 어머니의 충고에 푸름은 이렇게 말한다. “나무는 서 있으면 그만이야. 그게 나무의 아름다운 점이야.”

그 말을 바꾸어 이렇게 적고 싶다. 우리가 연결되는 기적 같은 순간을 현미경으로 보듯 확대해서 영원에 가까운 깊이를 지닌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 그게 소설의 아름다운 점이야.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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