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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50주기] 2020년 '특고'에겐 불태울 근로기준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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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50주기] 2020년 '특고'에겐 불태울 근로기준법이 없다

입력
2020.11.12 19:0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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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 준수가 아니라 적용을 요구해야 하는 게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그들에게는 지켜 달라고 할 근로기준법 자체가 없다. 지난달 22일 국회 앞에서 라이더유니온 관계자들이 며칠 전 정부가 발표한 배달이륜차보험료 대책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근로기준법 준수가 아니라 적용을 요구해야 하는 게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그들에게는 지켜 달라고 할 근로기준법 자체가 없다. 지난달 22일 국회 앞에서 라이더유니온 관계자들이 며칠 전 정부가 발표한 배달이륜차보험료 대책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배달하다 사고가 났는데, 음식값을 물라고 합니다.’, ‘사장이 폐차 직전의 오토바이를 렌트비를 받고 빌려줬는데, 사고 나니 수리비를 150만원 달라고 합니다.’, ‘갑자기 앱 접속이 막혔는데 평점 때문이라고만 하고 이유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라이더유니온을 하면서 들어오는 상담 내용들이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였다면 기업에 작업 도구를 제공하고, 사고의 책임을 분담하고, 노동법에 나와 있는 해고 절차를 따르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근로자가 아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지만, 플랫폼 노동자와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라고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우리는 화형시킬 근로기준법이 없다.

1970년 전태일이 불태워 새 생명을 얻은 근로기준법을 읽어보자. 너무 오랜 시간 일하면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근무시간과 야간노동을 제한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유급으로 쉬게 하고, 1년에 15일 정도는 연차유급휴가를 보장했다. 노동자의 근무조건이 불리하게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려면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으면 노동자 본인의 생명과 안전은 물론, 가족들의 생계도 무너지기 때문에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해고하게 하고, 1년 이상 일했다면 퇴직금을, 하루아침에 해고했다면 30일 치의 통상임금을 해고예고수당으로 준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최저임금을 도입했으며, 실업, 의료, 노후, 일하다 다쳤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4대 보험을 만들고 국가가 관리한다.

2020년, 혁신기업들에 의해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벌어지고 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신분에서 벗어나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단 택배 노동자들은 근무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아 너무 오래 일하다 죽는다. 플랫폼노동자라는 멋진 이름을 단 라이더들은 자기 돈으로 오토바이값과 엄청난 배달용 보험을 지불하고 도로 위의 성난 무법자처럼 달리다 죽는다. 배민은 지난해만 해도 몇 달에 한 번씩 바뀌던 배달료와 근무조건을 매일매일 바꾸더니, 이제는 하루에도 시간대별로 배달료가 3,000원과 4,000원을 오르내린다. 쿠팡이츠는 카톡 앱 푸시로 지금부터 시간당 얼마를 경매하듯 외치더니, 이제는 1분 단위로 배달료를 바꾼다. 최소한의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최저임금도, 불이익한 근무조건의 변경을 제한하는 법도 없다. 실업, 의료, 노후, 일하다 다쳤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4대 보험을 만들었던 국가는 플랫폼과 특수고용 노동자 이름 앞에 발길을 돌린다.

서글픈 것은, 자칭 혁신 기업들이 노동자를 위해서 근로기준법을 불태웠다고 당당히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전태일이 함께하고자 했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업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했더니 기업들은 최저 수준의 근로기준법만 준수한다. 최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면서, 온갖 직장 갑질과 성희롱, 산업재해로 고통 받는다. 이들에게 쟁취하고 싶은 노동자의 지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플랫폼 기업들은 이들의 구원자를 자처한다. 마켓컬리 같은 새벽배송을 하는 기업이 있어야 노동자들이 야간에도 일해 돈을 벌 수 있다.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줘야,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다고 말한다. 최저임금 때문에 기업들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주 52시간의 노동시간 제한을 거부하는 노동자들 때문에 특수고용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들을 만들었다. 4대 보험을 아까운 세금으로 느끼는 노동자를 위해 가입하지 않을 ‘권리’를 주고 원하는 노동자들은 민간보험에 가입하라고 한다. 근로기준법은 낡았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삶에 도움도 안 된다. 노동자의 지위를 포기하고 사장님의 지위만 받아들이면, 노동법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의 세계이자 혁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광고한다. 실제로 미 캘리포니아주에서 우버 기사나 배달노동자를 근로자로 봐야 한다는 AB5 법안이 주민투표로 부결됐다. 그들은 노동법상 근로자를 포기하고 회사가 보장하기로 약속한 개선안이 더 좋다고 이야기한다. 이들 플랫폼 기업은 이 투표 캠페인에 2,000억원을 쏟아부었다.

나는 종종 이 냉엄한 현실 앞에 절망한다. 노동운동이고 사회운동이고 해봐야 결국 힘과 권력을 가진 이들 앞에 패배하게 될지 모른다. 슬프게도 이때 떠오르는 인물이 전태일이다. 바로 그래서 이제 전태일을 떠나보내고 싶다. 우리의 요구를 1970년대 노동자의 삶에 가두고 싶지도, 법을 지키라는 최소한의 요구로 후퇴시키고 싶지도 않다. 이 사고에 갇혀 있는 한 소위 하층 노동자들의 요구는 영원히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일 수밖에 없고, 근로자 신분을 내팽개치는 게 자신의 삶에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쌍한 노동자나 허울뿐인 노동법이 아니라, 제대로 뭉쳐서 당당하게 싸우는 노동자와 이들을 지켜줄 제대로 된 노동법이다.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자로 가득 찬 법전을 읽어줄 친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법전을 다 읽고, 전문가가 되어 변호사가 되고, 노동법학자가 된다 한들 그가 느꼈을 절망은 바뀌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노동법이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일터에서 법이 살아 숨 쉬게 할 노동자들의 힘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대학생 친구가 아니라 절망 앞에서 함께 손을 잡아줄 동료였다. 이 시대의 전태일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도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여리고 우왕좌왕하고 부족하지만 함께 있어 줄 주변의 평범한 동료다. 그의 평전에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넣을 수 없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불렀던 시절, 그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불온하고 위험한 시절의 전태일은 살아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전태일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러야 할 이름은 전태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 불온한 상상과 주장을 하는 이들의 이름을 찾아내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전태일 50주기의 과제가 아닐까.

본보와 인터뷰 중인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배달 노동자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의 창설을 준비하던 2018년 10월 당시 사진이다. 류효진 기자

본보와 인터뷰 중인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배달 노동자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의 창설을 준비하던 2018년 10월 당시 사진이다. 류효진 기자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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