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둘러싼 ‘예산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부가 지난 9월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의 총지출 규모는 전년 대비 43조5,000억원(8.5%) 증가한 555조8,000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더불어민주당은 ‘초슈퍼 예산’에 대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국난극복을 위한 필수재원”이라며 원안 통과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국일보가 5일 예산안 세부내역을 분석한 결과, 경제 위기 극복과 성장 동력 확충이라는 당초 취지와는 거리가 먼 사업이 적지 않은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ㆍ여당이 “국가대전환 프로젝트”라며 무려 21조원을 투입하는 한국판 뉴딜 사업 10개 중 7개가 기존 예산을 부풀린 ‘재탕’이다. 또 과거 집행 실적이 부진한데도 내년 예산 규모를 늘린 사업도(6조원 규모)도 여럿이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권에서 대규모 삭감을 벼르는 이유다.
한국판 뉴딜… 10개 중 7개가 ‘재탕’
내년도 예산안의 핵심은 한국판 뉴딜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 등 신산업에 2025년까지 160조원을 투자해 일자리 190만개를 창출하는 국가 주도 경제 프로젝트다. 정부가 한국판 뉴딜의 원년으로 설정한 내년에 책정된 예산은 21조3,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정의당에 따르면, 예산안에 포함된 뉴딜 사업 640개 중 신규 사업은 189개(29.5%)에 불과하다. 금액 기준으로 신규 사업 규모는 3조원으로, 전체 사업비의 14.1%에 그쳤다. 기존 사업을 재탕하며 포장지만 ‘뉴딜’로 바꾼 셈이다.
예산 내역을 보면, 면밀한 검토 없이 급조된 사업이 적지 않다. 뉴딜 분야의 중소ㆍ중견기업에 투자하는 ‘뉴딜펀드’를 조성하기 위해 6,000억원이 반영됐다. 2018년 8조원 규모의 ‘혁신모험펀드’ 투자 실적이 2조5,000억원에 그쳤는데도 펀드를 또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산업단지 주변에 ‘미세먼지 차단숲’을 조성하는 사업은 198억원 증액(올해 508억→내년 706억)됐으나, 사업성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산림청이 지난해 실시한 모니터링 결과, 공업단지보다 차단숲이 조성된 주거지의 미세먼지 농도가 더 높게 측정된 지역이 있었다.
올해 예산의 실집행률이 사실상 0%에 가까운데도 ‘뉴딜’ 이름 아래 증액된 사업도 있었다. △국민체육센터 건립지원(393억원) △가정용 스마트 전력 플랫폼(1,586억원) 등이다.
예산 다 못 썼는데 또 증액? 집행 ‘낙제점’ 사업만 6조
예산 집행 부문에서 ‘낙제점’을 받은 사업들도 내년도 예산안에 대거 포함됐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최근 4년(2016~2020년)간 평균 집행률이 70% 미만이고 △올해 9월 말 기준 집행률이 50% 미만인 ‘연례적 집행부진’ 정부 사업은 총 164개(7조9,403억원)다. 이중 내년 예산이 증액되거나 올해와 동일하게 편성된 사업은 80개(6조3,581억원)에 달했다. 가령 여성가족부의 ‘가족센터 건립’ 사업은 91억원 증액(올해 365억→내년 456억원)됐으나, 올해 8월 기준 건립사업(62개소)의 실집행률은 12.5%에 불과하다. 종교 유적지 복원을 지원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종교문화시설 건립’ 사업 또한 실집행률이 12.2%에 그쳤지만, 내년 예산은 약 45억원 늘었다.
해외 가수 국비 지원? 코로나 시국에 종교활동 지원?
사업의 적정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예산도 적지 않다. 미얀마, 베트남 등에서 ‘케이팝(K-Pop)’ 가수를 발굴, 트레이닝부터 앨범 제작까지 지원하는 문체부의 ‘동반성장 디딤돌’(신규 15억원) 사업이 대표적이다. 민간 분야인 해외 아티스트 발굴과 육성을 국가의 ‘혈세’로 지원하는 게 타당하느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금융권 재직자, 핀테크 예비창업자 등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대학 금융전문대학원에 진학할 때 학비(590만원ㆍ비학위 과정)를 지원하는 ‘디지털 금융전문인력 양성’ 사업(올해 15억→내년 25억원)도 마찬가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과 어울리지 않는 사업도 국회 심의 과정에서 1순위 ‘삭감’ 대상으로 거론된다. △해외 실감형 콘텐츠 체험관 조성(40억원) △종교문화활동 지원(194억원) △국내 K-뷰티 체험ㆍ홍보관 상설운영(12억원) 등이다.
국민의힘에 정의당까지… “예산안 손봐야”
야권은 ‘현미경 검증’을 벼르고 있다. 국민의힘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들은 한국판 뉴딜 사업에서 10조원, 나머지 분야에서 5조원 등 최소 15조원을 감액한 후, 소상공인 지원, 긴급 돌봄지원 등 ‘코로나 민생 예산’으로 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도 “(한국판 뉴딜 예산에) 불평등ㆍ기후위기 극복은 없고, ‘그린’과 ‘스마트’라는 단어만 붙인 ‘대기업-SOC(사회간접자본) 맞춤형 사업’만 보인다”며 “적극적으로 예산안을 손봐야 한다”고 했다. 반면 민주당 예결위 위원들은 “한국판 뉴딜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고 우리 세대는 물론, 그 다음 세대의 먹거리를 준비하기 위한 필수적인 미래투자전략”이라고 반박하며 ‘원안’ 사수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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