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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살리려 단종에게 사약 올린 방연, 목 놓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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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살리려 단종에게 사약 올린 방연, 목 놓아 울었다

입력
2020.11.05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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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을 배경으로 한 국립창극단 창극 '아비. 방연'. 딸을 위해 신념을 꺾었으나 딸마저도 지켜내지 못한 아비의 애통한 심정이 묵직한 소리로 울린다. 국립창극단 제공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을 배경으로 한 국립창극단 창극 '아비. 방연'. 딸을 위해 신념을 꺾었으나 딸마저도 지켜내지 못한 아비의 애통한 심정이 묵직한 소리로 울린다. 국립창극단 제공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노매라.”

조선 초 수양대군 왕위 찬탈 사건, 즉 ‘계유정난’ 당시 강원 영월로 유배 가는 단종을 호송했던 의금부도사가 남겼다는 시조다. 맡은 임무와 품은 마음이 상반되는, 인간적 고뇌가 담겨 있다. 볕도 들지 않는 험준한 오지에 어린 왕을 홀로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국립창극단의 ‘아비. 방연’은 그 의금부도사, 왕방연의 이야기다. 영월로 가는 단종을 호송하고, 사약 내리는 임무까지 수행해야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숙종실록에 가서야 이름 한 번 거론될 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아름 작가와 서재형 연출은 거기다 작가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아비. 방연’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 극은 강직한 충신이었던 왕방연이 주군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부성애’로 풀어낸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던 왕방연은 갓 혼례를 치른 사위가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돼 죽고 딸 소사가 노비로 끌려갈 처지에 놓이자 결국 신념을 꺾는다. 단종을 영월로 유배하고, 사육신 집안을 도륙내고, 마침내 사약을 들고 영월로 향한다. “깨진 신념이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에 울부짖으면서도 “난세의 영웅이 아닌 아비로 살겠다”고 자신을 다잡는다.


'아비. 방연'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한 인물을 통해 비극적인 시대의 한 장면을 조명한 역사극이기도 하다. 국립창극단 제공

'아비. 방연'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한 인물을 통해 비극적인 시대의 한 장면을 조명한 역사극이기도 하다. 국립창극단 제공


왕방연의 부성애는 이중적이다. 내 자식 살리겠다고 남의 어린 자식들을 어미가 보는 앞에서 죽인다. 왕방연 자신을 아비처럼 믿고 따르고 의지했던 단종의 원통한 죽음도 견뎌내야만 하는 일이다. 때문에 관객은 방연의 처지에 같이 아파하지만, 그를 편들 수만은 없다. 극은 관객들을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아이러니 속에 던져넣는다. 역사가, 시대의 소용돌이가 이름 모를 보통 사람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작품이어서일까. “어린 새 한 마리, 외롭고 지친 몸으로 첩첩산중을 헤매네” “아버지, 나 다시 아이가 될까, 아버지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으니” 같은 시적인 사설과 노랫말이 귀에 감긴다. 배우들의 깊은 성음은 가슴을 파고든다. 왕방연 역 최호성은 태산처럼 묵직하고, 수양대군 역 김준수는 광기와 불안을 능란하게 변주한다. 도창을 맡은 김금미의 무게중심, 단종 역 민은경의 외유내강도 조화롭게 어울린다. 8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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