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 수난시대다. 독감백신 접종 뒤 이틀 만에 숨진 인천 17세 고교생의 형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동생이 독감주사를 맞은 다음날 기운이 없어 저녁조차 먹지 않았다면서, 아질산염이 위에서 검출돼 자살로 종결 지으려 한다고 억울함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독감주사까지 맞으면서 자살이라니”, “자살할 사람은 독감주사 안맞는다”는 식의 의견들이 인터넷을 달궜다.
백신 문제는 애초 9월부터 일부가 유통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돼 접종이 중단되면서 국민을 불안하게 한 터였다. 13~18세용 무료접종에 쓰일 백신이 2~8도의 냉장상태로 보관돼야 함에도 병원에 종이박스로 운반된 것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 이렇게 관리됐다.
국가 공권력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풍경은 이뿐 아니다. 독감백신을 맞고 노인들이 사망하는 데도 방역당국은 남일 얘기하듯 안심하고 맞으라는 태도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앞서 북한 피격으로 숨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태가 불을 당겼다. 해경과 국방부는 여론이 수긍할만한 월북의 증거를 아직도 내놓지 않고 있다. 고작 도박빚이 알려진 것보다 크다는 황당한 이유뿐이다.
정부를 불신하게 된 원인은 정보에 대한 투명성 부재가 결정적이다. 형식적인 공정함이나 상식적인 정보조차 국민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국민은 공권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고, 스스로 생명을 지켜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국가가 하는 일은 결국 사람인 공무원이 하는데 공무원을 믿지 못한다. 역대 정권들이 번갈아 실정을 거듭하면서 국민신뢰가 깨진 학습효과 역시 고착화되고 있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진보진영의 상징이나 어른으로 불려온 인물들이 뼈아픈 정권 비판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신작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에서 “문재인 정권의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강연에서 “권위주의 시기 의회를 거수기라 비판했지만, 지금 여당과 차이가 없다”며 “난 민주당보다 민주주의가 좋다”고 일침을 놓았다.
공권력 추락의 결정판은 지금 서초동에서 매일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국민을 가운데 놓고 낯뜨거운 막장싸움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추미애 장관과 윤석열 총장을 함께 퇴진시키거나 정리하지 않는다. 가타부타 말이 없다. 공권력 붕괴와 공백을 방치하는 것이다. 물론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탄탄히 유지되고 있다. 비결이 뭘까. 역설적이지만 치열한 정치현안에 철저히 거리를 둠으로써 상처받지 않는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와 관련된 윤미향 의원 의혹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속시원한 언급은 없었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은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자 공천의 길을 텄다. 5년 전 문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 만든 당헌 규정의 원칙을 번복하며 전당원 투표 형식을 방패삼아 뒤로 숨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위선과 냉소로 신뢰가 깨지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 정부의 말이 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정치과정과 정책현안을 통해 국민의 믿음을 얻는 노력에 몰두해야 하는 이유다. 신뢰받지 못하는 정부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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