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자꾸 먹어가며 내 마음 속에 메피스토펠레스가 자란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속삭인다. 때론 윽박지른다.
“책을 덮어. 공부할 만큼 했잖아. 그까짓 이치 하나, 지식 하나, 시 한 줄, 더 알아서 뭐 하겠어. 이제 써먹을 곳도 알아 줄 사람도 없어. 돈도 안 되잖아. 어느 날 치매가 오면 말짱 도루묵이야. 바깥으로 나가, 나가서 마음껏 놀아.”
이 유혹은 매우 달콤해서 실제로 글 한 줄 읽지 않고, 뉴스도 멀리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몇날 며칠을 이 구실 저 구실 만들어 무위도식하며 놀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듦의 그런 건방과 교만을 도끼로 내려친 이가 있으니, 향가 연구에 미친 내 친구다. 고등학교 동창인 그를 사사로이 자랑하려는 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국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그런 그가 사람들이 별 관심도 없는 고대 향가 연구에 자기 밥벌이 틈틈이 40년이나 매달리고 있으니 내게 평생 공부란 게 무언지, 나이 들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 친구다.
그 친구 김영회는 전라남도 임자도라는 섬에서 나고 자란 촌놈이다. 임자도는 새우젓, 민어, 병어, 소금, 튤립, 대파로 유명한 섬인데 사람들은 잘 모른다. 조선 후기 적지 않은 유학자들이 유배된 곳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마을의 전통인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그가 향가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고문(古文) 수업 시간이었다고 한다. 처용가를 읽으며 향가 작법의 수수께끼에 매료돼 평생의 공부 업으로 삼겠다고 작심했다.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품고 한문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를 연마하며 수없는 신라 고서와 심지어 암호해독법까지 들여다보며 향가 25수의 열쇠를 열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유레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향가 해독법을 정립한 양주동 박사 묘소를 찾아가 술을 한 잔 올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야말로 천둥번개처럼 영감이 내리꽂혔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 1월 ‘천년 향가의 비밀’이란 책을 내면서 처음으로 기존의 향가 해독법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가 깨친 해독법으로 모든 향가를 재해석했다. 그의 향가 해독법은 최근 고대문학을 다루는 두 국내 학회지에 논문으로 정식 채택돼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논쟁 중이다. 그는 더 나아가 일본의 고대 시가(詩歌)인 4,516수 만엽가까지 향가 창작법으로 해석해내고 있다.
난 향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학문적 소양은 없다. 다만 이 나이까지 돈도 안 되는 그 향가 하나를 붙잡고 매진하는 그의 삶의 태도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술을 끊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은퇴 후 그의 생업은 농장일이다. 서해안에 가꾼 자신의 작은 농장에서 은행나무를 키우며 취미 삼아 목판에 문인화를 새긴다.
“넌 하는 일도 많고 바쁜데 왜 향가에 미쳤냐?”
“사람한텐 말이야, 숙명 같은 화두가 있어. 신라인들이 내게 말을 걸어.”
이제는 그만 책을 덮으라는 메피스토의 속삭임에 홀릴 때마다 난 그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래, 정신줄을 놓지 말자. 비가 와야 무지개가 뜨는 법. 늙어가는 나에게 남은 세월이 주는 건 부패냐 발효냐 둘 중 하나뿐이다. 늦지 않았다. 나도 그처럼 뭐라도 하나를 붙잡고 용맹정진해야겠다. 내게도 목욕하다 알몸으로 뛰쳐나가 “유레카”를 외칠 그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대도 더욱 더 정진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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