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4> 노량진 수산시장 육교
칠패시장 등 강북 수산시장 1970년대 강남개발 맞춰 노량진으로
2016년 신시장 준공하면서 갈등 폭발 '직수살수' 충돌까지
관리 당국-상인들 상생 선택 아쉬워
오늘 찾아갈 길은 경부선 노량진역에서 옛 노량진 수산시장을 잇던 육교다.
2020년 11월 현재 옛 노량진 수산시장(구시장) 건물은 철거되었고, 구시장에서 영업하던 상인들은 2016년에 완공된 새 노량진 수산시장(신시장) 건물로 옮겨갔다. 구시장 건물이 철거되었으니 노량진역에서 구시장으로 가던 육교도 철거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이지만, 아직 육교는 남아 있다. 또한 육교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지만, 지금 이 육교에는 십 수명이 장기간 머무르고 있다. 구시장 건물 철거에 반대한 상인들이다.
이들 상인들을 육교에서 몰아내고 구시장 건물 철거를 완료하려는 수협 측과 이에 반대하는 상인들이 지난 10월 29일에 육교의 구시장 건물 방향에서 충돌했다. 상인 및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철거하려는 측이 자신들을 향해 곧바로 물대포를 쏘았다며(직사살수) 철거의 주체인 수협중앙회장, 그리고 철거 용역들이 직사살수하는 것을 경찰들이 수수방관했다며 동작경찰서장을 고발했다. 2015년 11월에 경찰이 직사살수하여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것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고, 2017년 3월에 서울대학교 행정관을 점거한 학생들에게 교직원들이 소화전 물을 뿌린 것을 인권위에서 인권침해로 판단한 것 등이 고발의 근거라고 한다.
노량진역은 동작구에 속하고, 동작구는 1980년까지 관악구에 속했다. 그리고 동작구를 포함한 관악구는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영등포구에 속했으니, 이들 지역은 모두 범 영등포 생활권이다. 이처럼 생활권이 일치하다보니 관악구에 살고 있는 나는 이래저래 노량진역을 자주 이용하고 그 앞을 자주 지나다닌다. 그때마다 구시장 건물 철거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해왔다. 대서울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시장이 자리한 땅과 구시장 건물과 구시장 상인들은 대서울이 경험한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소문 일대 수산시장, 강남개발 맞춰 노량진 이주
현재 대부분 신시장으로 옮겨간 수산물 상인들이 처음 영업을 시작한 곳은 지금의 서울역 북쪽 서소문공원 자리였다. 이 일대에는 조선 시대부터 건어물 유통이 활발하던 칠패시장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남대문 밖에서 세력을 확대하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추어 선어(鮮魚) 시장이 곳곳에서 개장되었다. 20세기 초에 난립한 선어 시장들은 1939년에 통합되어, 30년 정도 서울역 북쪽에서 수산시장이 성업했다. 서소문공원 서쪽의 한국경제신문사 건물, 예전에 통일민주당사 건물로 쓰이던 서부중앙의원, 그리고 염천교 수제화거리 주변에 지금도 횟집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렇게 성업하던 서울 강북의 수산시장은 1975년 8월 31일에 지금의 구시장 자리로 옮겨 간다.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강북 지역의 발전을 억제하고 강남 지역을 새로운 도심으로 발전시키려는 도심억제정책을 추진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서소문 공원 자리에 있던 청과물시장과 수산시장이 경부선 철길 따라 용산과 노량진으로 옮겨 갔다. 청과물과 수산물 모두 산지에서 소비시장인 서울까지 철길로 이동하던 시절이었기에, 철도 교통망을 따라 도매상들이 도심에서 외곽으로 옮겨간 것이다. 참고로 용산에 있던 청과물시장이 다시 한 번 옮겨간 것이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이고, 용산 청과물 시장 건물들에 새로이 들어선 것이 용산 전자상가다. 청과물시장 시절에 용산에는 서울청과주식회사?나진시장?태양시장?농협공판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용산전자상가 한가운데 하나로마트 용산점이 있는 것이다.
구시장 건설로 철거된 노량진 강변마을
한편, 수산시장이 옮겨간 노량진 땅은 빈 땅이 아니었다. 이곳은 1936년에 경성으로 편입되기 전부터 한양?경성과 한반도 남부를 잇던 중요한 나루터였고, 월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월파정은 현대 한국 초기의 저명한 정치인이던 장택상의 별장으로 쓰였기에, 지금도 이 자리에는 별장회식당이라는 횟집이 있다. 식당 옆의 커다란 고목나무가 노량진의 오랜 역사를 전한다.
이 고목나무 옆에는 마을이 하나 있었다. 일제 시대의 대중 문화 연구를 개척한 책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연구, 1999)를 쓴 김진송은,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이 마을을 강변마을이라 부른다. 이 강변마을과 여의도 모래섬 사이의 샛강에도 판자촌이 있었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은 그 존재조차도 몰랐던 이 두 마을에 대해서는 김진송의 또 다른 책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 1968 노량진 사라진 강변마을 이야기'(세미콜론, 2006)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여의도 샛강의 판자촌과 구시장 자리의 강변마을은 여의도 개발과 구시장 건설로 인해 철거되었다. 김진송은 여의도 개발이 한창이던 무렵의 경관을 이렇게 증언한다. “강 건너 여의도는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드넓던 모래땅이 반듯한 섬으로 변했고 손에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이들 주민 가운데 일부는 지금의 관악구 봉천동으로 이주했다. “여의도에 살던 사람들은 이미 봉천동인가 어디의 산꼭대기로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남현동을 제외한 관악구 지역은 1963년에 경기 시흥군에서 서울 영등포구로 편입된 뒤로 서울 곳곳의 철거민이 재정착한 대표적 지역이다. 이들이 이주한 봉천동 땅에는, 이들이 국회가 들어선 여의도에서 왔다고 해서 국회단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주를 염두에 두고 국회단지에 다녀온 김진송의 아버지는 “아 글쎄 봉천동인지 산꼭대긴지 올라가 봤더니... 산비탈에 손바닥만한 데다가 새끼줄을 쳐 놓고는 거기서 살라데”라며 분노했다. 현재 국회단지 주민들은 이곳에 국회 관계자들이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철거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기 위한 선의의 착각이라 하겠다.
갈등 끝 40년 만의 재철거, 타협은 불가능했을까
이렇게 두 마을 사람들을 쫓아내고 1975년에 들어선 구시장이, 40여년 뒤인 2016년에 신시장이 준공되면서 구시장 상인들이라는 또 다른 철거민들을 만들어 냈다. 돌이켜보면 노량진 땅의 기구한 팔자라 하겠으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대서울 아니 한국 도시 지역의 어디에서나 이런 개발과 철거의 되풀이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은 현대 한국의 도시민들에게 불가능한 사치다. 대부분의 한국 시민은 철거민이다.
한국냉장이 운영하던 구시장은 2002년에 수협중앙회에 인수되었고, 수협은 2012년부터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을 시작했다. 그 핵심은 구시장 건물의 철거였다. 내가 구시장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2014년 즈음의 사진에는 흥성하던 시절의 구시장 건물이 담겨 있다. 이 시절에 내가 받은 느낌은, 노량진 수산시장은 시장 상인들이라는 소프트웨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시장 건물이라는 하드웨어가 함께 있음으로 하여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월파정-장택상 별장-별장회식당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땅이 여기에 의미를 더했다.
물론 도시는 성장하며, 재건축?재개발은 필요악이 아니라 도시의 선순환을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나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긍정하기조차 한다. 하지만 구시장의 역사적?문화적 상징성과 중요도를 고려한다면, 최소한 월파정-장택상 별장-별장회식당으로 이어져 온 작은 땅에 인접한 구시장 건물 일부만이라도 존치시켜 상인들에게 영업을 지속하게 하고, 나머지 땅을 활용하는 방법도 수협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였다.
노량진 수산시장과 마찬가지로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도 재건축을 둘러싸고 관리 당국과 상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나, 다행히 타협이 이루어졌다. 노량진 수산시장도 이런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2016년부터 수협과 구시장 상인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 끝에 구시장 상인에 의한 수협 직원에 대한 살인미수 사건과 수협 측 용역에 의한 구시장 상인에 대한 직사살수 사건이 발생한 현재, 타협이라는 선택지는 없어진 듯하다.
수협중앙회가 신시장 건물을 신축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구시장 건물에서 영업하던 다수의 상인분들도 각각의 사연을 안은 채 신시장으로 옮겨갔을 터이다. 물론 현재 초겨울 바람을 맞으며 끊긴 육교 위에서 농성중인 몇몇 구시장 상인들에게도 사연은 있을 것이다. 상인들이 신시장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인 2017년부터 구시장 건물의 벽면 곳곳에 태극기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대서울을 답사하다보면 재건축?재개발 지역에 태극기가 걸려 있고 그려져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도 감히 이 건물을 헐어낼 수 있겠느냐는 절박함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물론 철거하는 측은 태극기라는 상징에 개의치 않지만.
서울역에서 출발해서 철길 따라 노량진으로 내려온 수산시장. 노량진 수산시장이 나아갈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지난 10월에 육교 끝에서 발생한 충돌을 보면서, 그 두 갈래 길 가운데 하나는 구시장 건물의 철거와 함께 육교에서 끊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나의 길을 택하여 신시장으로 이전하신 상인분들의 번성을 기원하는 동시에, 또 다른 길을 택하여 육교 위에서 농성 중인 구시장 상인분들의 건강과 작은 해피 엔딩을 기원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