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훈 부산본부 차장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BTS)의 '불타오르네' 뮤직비디오를 보다가 갑자기 섬뜩함이 몰려왔다. 뮤직비디오 장면 곳곳에 불길이 넘쳐나는 모습을 보며, 지난달 9일 발생했던 울산 33층 주상복합 아파트 대형 화재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만 보고도 이런 감정이 몰려오는데, 그날 현장에서 화재와 직접 사투를 벌여야 했던 주민들은 트라우마가 얼마나 극심할까 싶었다. 다들 건강은 하실지, 생활은 잘 하고 계신지 여러 궁금증이 스쳤다.
그날의 사건은 정말 다행이었다. ‘기적’이었다는 말들도 나왔다. 순식간에 대규모로 번진 불이었지만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침착함을 잃지 않은 주민들의 시민 의식과 소방관들의 신속한 대응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주민들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화재 매뉴얼에 따라 움직였다. 방화문이 설치된 옥상과 야외테라스 등으로 재빨리 대피했다. 일부 주민은 초인종을 눌러가며 이웃을 함께 불길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자 어린이와 노약자가 대피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소방당국의 대응도 신속했다. 소방관들은 신고 5분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집집마다 다니며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주민들이 호흡보조기나 젖은 수건으로 입을 가릴 수 있도록 도왔다. 고층에서 여성과 아기를 업고 계단을 뛰어내려온 소방관들도 있었다.
첨단 장비가 기적을 낳은 것도 아니었다. 울산에는 고층 건물 화재에 대응하기 위한 고가사다리차가 없었다. 초기 진화나 효율적인 면에서 그 같은 장비가 필요한 것은 맞다. 다른 지역에서도 고가사다리차 도입을 서두른다고 야단법석일 정도다. 하지만 그게 본질이 아님을 울산 화재에서 주민들과 소방관들이 보여준 행동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코로나19라는 화마(火魔)가 진행 중이다. 크고 작은 감염이 지역사회 곳곳에서 발화(發火)하듯 계속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를 완전히 진압할 수 있는 치료제나 백신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화재가 난 울산에 고가사다리차나 최신예 소방 장비가 없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울산 화재에서 보여준 주민들의 시민 의식과 소방관들의 사명감이 국민과 정부에 필요한 시점이다. 시민 의식에 기반한 생활 방역과 정교한 정부 정책이 관건이다. 물론 그 동안 우리 국민과 정부는 비교적 잘 해 왔다. 그렇지 못했던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규 발병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유럽 일부 나라에서는 부랴부랴 재봉쇄 조치 등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 해도 불은 완전히 꺼질 때까지 꺼진 게 아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코로나19 대유행 위기에 대한 걱정이 다시 커지고 있다. 경제와 방역 사이에서 적절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세분화하며 이전보다 경제쪽에 좀더 방점을 찍은 것 역시 부담스러운 요인이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데 코로나19가 갑자기 증발할 리는 만무하다. 믿을 수 있는 건 묵묵히 참고, 매뉴얼을 지키면서 조심해 온 우리 자신뿐이라는 걸 명심하면 좋겠다. 참된 시민 의식의 진위(眞僞)는 위기 때 가려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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