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해적’ 안무한 솔리스트 송정빈
어느새 포기에 익숙해질 무렵, 마침내 무대가 허락됐다. 국립발레단이 4~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리는 전막 발레 ‘해적’ 얘기다. 코로나19 때문에 연말이 다 돼서야 선보이는, 올해 첫 정기공연이다.
최근 찾아간 국립발레단 연습실은 ‘해적’의 열기로 후끈했다. ‘해적’ 안무를 맡은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송정빈(34)은 “1년 가까이 공연 취소, 연기를 반복하면서 무용수들도 많이 힘들었다”며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다”고 환하게 웃었다.
‘해적’은 19세기 영국 시인 바이런의 동명 극시를 바탕으로, 러시아 고전 발레를 완성한 프랑스 출신 안무가 마리우스 페티파가 1899년 만든 작품이다. 해적단 두목 콘라드와 소녀 메도라의 사랑, 2인자 비르반토의 배신 등을 다룬다.
송정빈은 원작을 과감하게 각색, 국립발레단만의 버전으로 새롭게 안무했다. 가장 큰 변화는 캐릭터다. 원작에서 여주인공 메도라와 귈나라는 노예로 팔려간 그리스 소녀였지만, 각각 플로리아나 섬의 소녀, 마젠토스 왕국의 대사제로 바꿨다. “19세기 작품이라는 걸 감안해도 몇몇 성차별적인 설정들이 불편하더라고요. 고전에 손 댄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발레도 시대 흐름에 맞게 변해야 하니까요.”
전체 3막이었던 서사는 2막으로 압축, 속도감을 높였다. 원작에 없던 해적단의 활약상도 새로 집어넣었다. 1막 도입부에서 선보이는 해적단의 군무는 무용수들이 꼽는 최고의 명장면이다. 해적선이 난파하면서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이에 맞춰 음악도 50% 이상 편곡했고, 아예 새로 만든 곡도 있다. 창작에 가까운 재해석이다.
그래서 ‘해적’은 단순 공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저작권 문제가 없으니 국립발레단 고유 레퍼토리로 발전시킬 수 있고, 영상화 작업도 가능하다. 송정빈은 “우리는 항상 해외 작품을 사 오기만 했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 우리만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얻었다”고 했다.
송정빈은 러시아 페름발레스쿨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200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솔리스트로 활동하면서 2016년부터 꾸준히 소품 안무작을 선보여 왔다. 전막 발레 안무는 ‘해적’이 처음이다. 클래식 발레에 충실하면서도 입체적인 대형과 구성, 특유의 움직임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힘든 동작이 많아서 무용수들이 저를 많이 원망했대요. 제가 췄어도 제 안무를 욕했을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무용수가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야 좋은 작품이 나와요. 제가 무용수로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에요.”
장점도 있다. 현직 무용수가 안무를 하니 각 무용수마다 특기에 맞춘 안무를 짤 수 있다. 소통도 훨씬 편하다. 앞으로도 꾸준히 안무에 도전할 생각이다. 요즘엔 클래식을 들으면 발레 동작이 떠오르는 ‘직업병’도 생겼단다. “관객들이 사전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해적’을 보는 시간만이라도 현실을 잊고 힐링하셨으면 좋겠어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