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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이사법

입력
2020.10.30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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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쩌다 보니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닌다. 최근에는 회사 사무실 역시 2년마다 옮겨다니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이사업계의 VIP 고객이 된 느낌이다. 어릴 때도 이사를 자주 다녔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 되면 안되는 대로, 행정구역 안에서 여러 곳을 옮겨다니는 사이 어른이 되었다. 나중에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보니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이사를 다녔는데, 다행히 학교를 옮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려운 와중에도, 전학 스트레스 한 번 없이 학업을 마치게 해주신 부모님의 배려가 새삼 감사하다.

어릴 적 이사는 집안 잔치였다. 이삿날이 되면 아침부터 친척들이 집 안팎을 드나들며 짐을 옮겼다. 새로운 집에 짐을 푼 뒤에는 대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어렸으니 힘든 일은 죄다 어른들 몫이었기에 북적이는 풍경에 괜히 들뜨기만 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는 친구들도 집에 들러 이사를 도왔다. 손을 빌리는 일이 서로에게 큰 부담은 되지 않던 시절이 어느덧 아주 옛날 얘기가 되었다.

요즘은 다르다. 언제부턴가 이사는 가족만의 행사가 되었다. 가족과 친구의 손을 빌려 짐을 나르는 경우도 여전히 적지 않겠지만, 포장이사가 유행하기 시작한 뒤론 가족 아닌 이를 불러 이사를 돕게 하는 풍경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사 당사자가 힘쓸 일 이 없어진 '현대식' 이사는, 높아진 비용만큼이나 간편하고 편리하다. 짐을 빼는 당일까지 모든 게 널브러져 있어도 이사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하게 되면, 포장이사 없이는 이사할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서너 명의 장정들이 무겁고 커다란 짐들을 가뿐히 들어 옮기는 풍경은 종합예술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저 많은 짐들을 저렇게 간단히, 또 빠르게 다른 곳으로 옮겨둘 수 있을까. 세상 참 좋아졌다.

2년마다 이사를 다니며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우리나라에 외국인 근로자가 정말 많이 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를 처음 감지한 건 2년 전 이사 견적을 받으면서부터다. 세 업체 중 두 곳이 "외국인 없음"을 '특약' 사항으로 내걸었다. 이유를 묻자 두 업체 직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싼값에 외국인 노동자 쓰는 곳들이 많아서요. 저희는 전부 한국인입니다."

하지만 4년이 지나는 사이, 이제는 특약에 들어가는 문구의 주어가 외국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외국인 근로자를 쓰지 않는 업체가 소수가 된 것이다. 4년 전 이사를 맡겼던 업체에 다시 견적을 받았는데, 이번엔 특약 사항에 '외국인 없음' 대신 '전원 한국인'이 적혀 있다. 외국인 유무가 상관없어 말 없이 도장을 찍었는데, 역시나 이사 당일 짐을 나르러 온 4명 중 3명이 모두 외국인이었다. 국적을 묻지 않았지만, 외모나 억양을 봤을 때 몽골인이거나 중국 교포로 보였다. 한 사람은 한국말이 어눌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유심히 들으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말이 유창했다.

이사는 무사히 끝났다. 새로운 집으로 옮겨온 짐에는 더는 지인들의 지문이 남지 않는다. 세탁기를 말끔히 재설치하고, 블라인드를 감쪽같이 조립한 뒤 "안녕하세요"를 또렷이 남긴 뒤 현관문을 닫는 몽골인 근로자의 뒷모습에서, 글로벌 비즈니스의 흔적을 본다. 점점 더 빠르게 변하는 사회, 준비할 것이 더 많아진다.



서형욱 풋볼리스트 대표ㆍ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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