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젊은이의 양지'? 내놓은 신수원 감독
“언제 끝날까요. 우리끼리 싸우는 거.”
취업준비생 미래(정하담)의 낮은 읊조림이다. 갑과 을이 싸우는 게 아니라 갑의 성공을 위해 을과 을끼리 벌이는 전쟁. 이 전쟁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전쟁이다. 28일 개봉한 영화 ‘젊은이의 양지’는 을간의 전쟁을 다룬다.
미래의 엄마 세연(김호정)의 직업은 채권추심 콜센터의 계약직 센터장. 엄마 또한 정규직이 되어야 하는 을. 그 을을 벗어나려면 세상의 을들에게서 돈을 더 잘 받아내야 한다. 세연은 정규직 채용을 위해 업무실적을 압박하고, 이 압박은 열아홉 나이로 콜센터 실습생이 된 준(윤찬영)에게 고스란히 내려온다.
사진을 전공하는 고교 3학년생 준은 실적을 위해 연체자에게 모진 말을 해야 하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낀다. 화장실 갈 틈도 없어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할 정도로 전화를 끼고 살아야 하는 생활에 지쳐가던 준. 센터장이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은 고작 “나도 너처럼 힘든 시절이 있었다”, “여기서 인생실습 한다고 생각하라”는 것뿐이다.
준과 미래를 대하는 세연은 이중적이다. 얼결에 신용카드 연체대금을 받으러 간 준에게 세연은 “알량한 자존감 팔아서 받는 게 월급”이라며 어떻게든 받아내라고 윽박지른다. 하지만 취업준비에 지쳐 콜센터에 취직해버릴까 묻는 미래에겐 “넌 그런 거 할 애가 아니다”라면서 “목숨 걸고 노력하면 다 된다”고 다그친다.
영화는 카드대금 연체자의 죽음을 목격한 준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뒤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본격 시작한다. 사고 후 세연에게 전달되는 준의 메시지. 준은 왜 죽음을 택했을까. 준이 세연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명왕성’ ‘마돈나’ 등을 연출한 신수원(53) 감독은, 예전 작품들처럼 미스터리한 구조를 따라 비밀을 풀어간다.
27일 만난 신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행복한 삶을 뒤로 미룬 채 무한한 경쟁과 돈에 몰린 세대에게 보내는 따뜻한 사과이자 위로”라고 소개했다. 주인공 세연을 통해 기성세대의 반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신 감독은 4년 전 19세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 중 전동열차에 치어 사망한, '구의역 김군 사건'에 영향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 이후 콜센터 실습생의 자살 사건을 다룬 TV 다큐를 접한 뒤 시나리오 윤곽을 정했다. 촬영 시작 직전 들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망 소식도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고 현장을 상상만 해도 너무 처참하다”며 “나도 자식이 있다 보니 부모의 마음으로 접근하게 됐다”고 했다.
을끼리 다투는 세상의 풍경을, 청년 세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성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신 감독은 준이 아닌 세연의 시선을 영화의 중심에 뒀다. 일에 함몰된 세연이 준의 죽음을 계기로 청년들 이야기를 듣는다는 내용은, 사실 신 감독 자신의 경험이었다. “저도 한때는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어딨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대 청년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보며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영화를 만들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어요.”
신 감독은 콜센터 직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 취업준비생 등을 직·간접 취재하며 들은 내용을 시나리오에 녹여 냈다. 면접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는 취준생, 화장실 한 번 가는 것까지 감시 받아야 하는 콜센터 직원의 모멸감 등은 모두 현실의 반영이다.
준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는 원인은 세연이 제공한다. 하지만 세연은 악인이 아니다. 다소 무책임한 진단 같지만 영화는 세연을 모질게 만들고 청년세대를 사지로 내모는 것이 ‘이윤만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청년세대가 겪는 문제의 핵심을 찾기보다는,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자책으로 끝을 맺는다.
중학교 교사로 10여년간 일하다 영화계로 뛰어든 신 감독은 그간 현대 사회의 다층적인 병폐를 드러내는 데 천착해 왔다.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언급상을 받은 ‘명왕성’은 입시 제도에 따른 학교 내 계급 문제를 다뤘고,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던 ‘마돈나’는 생명 위에 군림하는 자본을 꼬집었다. 신 감독은 “을로 태어나 을로 쭉 살아와서인지 을의 시선에서 본 사회의 부조리한 면이 자연스레 영화에 녹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신 감독은 ‘젊은이의 양지’ 개봉 직전 신작 ‘오마주’ 촬영을 마쳤다. ‘기생충’의 이정은이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한 중년 여성이 1960년대 활동한 여성 감독의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는 “이전 영화처럼 어둡진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족들도 왜 계속 어두운 내용의 이야기만 찍냐고 해요.(웃음) 세상의 밝은 면을 보는 만큼 어두운 면도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조그맣게나마 빛이 있잖아요. ‘젊은이의 양지’가 그런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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