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대에 그려진 궁중 기록화 ‘기사계첩’(耆社契帖)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다. 승격 이유가 재미있다. 그림 그 자체의 가치 못지 않게 왕실 하사품의 원래 모습을 300년 넘게 잘 보존한 3중 보호 보관함 덕이어서다.
문화재청은 29일 ‘기사계첩’(보물 제639호)을 국보로 지정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화첩은 조선 왕실이 1719년(숙종 45년) 이뤄진 숙종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기념해 만들었다. 기로소는 국가의 큰 어른들을 모시는 곳으로, 70세가 넘은 정2품 이상 노년 문관이 주된 대상이었다. 입소 당시 숙종 나이는 59세였으나, 태조 이성계가 60세에 들어간 선례에 따라 입소를 결정했다.
기로소 입소 때는 이를 기념하는 화첩을 만드는데,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단체 기념사진 같은 것이다. 영광된 자리인 만큼 여러 개를 만들어 참석자들이 나눠 가졌다. 입소식 이듬해인 1720년 완성된 기사계첩 또한 입소한 신하들에게 나눠 준 11첩, 기로소 보관용 1첩 등 12첩이 제작됐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존재가 파악된 건 5첩이다.
현재 전하는 기사계첩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뿐이었다. 이번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예고된 기사계첩은 홍만조(1645∼1725)에게 하사돼 풍산홍씨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 온 것이다.
내용 자체는 다른 기사계첩과 비슷하다. 기로소 문신 임방(1640∼1724)이 쓴 서문, 경희궁 경연당 연회 때 숙종이 지은 글, 대제학 김유(1653∼1719)의 발문, 참석자 명단, 행사 기록화, 기로소 문신 11명의 명단과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 계첩 제작자 명단 등이 수록돼 있다. ‘만퇴당장’(晩退堂藏ㆍ만퇴당 소장), ‘전가보장’(傳家寶藏ㆍ가문에 전해 소중히 간직함)이라는 글씨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홍씨 집안 기사계첩이 국보로 승격된 결정적 이유는 계첩 보관함이다.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왕실에서 직접 이를 기념하는 물품을 만들어 내려 준다는 점에서 기사계첩을 받는 건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니 내용물을 그저 내려 주고 받는 게 아니라 내함(內函ㆍ궤 안에 담는 함), 호갑(護匣ㆍ가방 형태의 보자기), 외궤(外櫃ㆍ맨 바깥 상자) 3중 구조로 정성스레 감쌌다.
전문가들은 이 부분을 높이 쳤다. 문화재청은 “왕실 하사품이 일괄로 갖춰진 드문 사례라 왕실 하사품의 차림새를 복원하는 데 귀중한 근거가 되고, 그 자체로 공예품인 함의 제작 수준 또한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계첩이 하사 당시 원형 그대로 3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 또한 3중 구조 덕분이다.
한편, 문화재청은 ‘경진년 연행도첩’,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1의2’,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 등을 보물로 지정한다고 예고했다. 경진년 연행도첩은 1760년 11월 한양에서 청나라로 떠난 동지사행(冬至使行)의 내용을 영조가 볼 수 있게 만든 화첩이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언해) 권상1의2는 세조가 불경에다 한글 토씨를 달아 금속활자로 간행한 불경이다. 분류두공부시(언해) 권11은 훈민정음 창제 뒤 처음 간행된 번역 시집이다.
문화재청은 30일간 각계 의견 수렴 뒤 국보ㆍ보물 지정을 확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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