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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가 남자들의 일이었다면

입력
2020.10.29 06: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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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찬바람이 부는 계절, 여성들의 마음은 더 춥고 슬프다. 이른바 ‘낙태죄’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행보가 뒷걸음질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조항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그 후속작업으로 진행된 관련 법개정이 영 미진하다는 게 여성들 생각이다.

정부는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고 14주 이내 허용, 24주까지 조건부 허용’을 골자로 한 법률 개정을 입법 예고한 상태다. 15~24주일 경우, 질병이나 성범죄 등의 기존 낙태 허용 사유에 사회· 경제적 사유를 추가하면서 상담과 24시간의 숙려기간을 거치도록 했다. 낙태 허용 사유가 좀 늘어나고 배우자 동의 요건 등이 삭제되는 등 발전된 일면도 있지만 ‘처벌의 틀’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제자리걸음이라는 평가다.

이를 두고 논쟁이 뜨겁다. 생명 보호를 외치는 ‘프로 라이프’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프로 초이스’가 제각각 외치고 있다. 실효적인 면에서 검토할 문제가 있다. 임신 중단(낙태)을 형법상 금지하면 낙태가 줄어들고 생명이 보호될까?

첫째는 많은 연구가 낙태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 해서 낙태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알린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임신중절은 합법화됐다 해도 증가하지 않고, 낙태 금지는 불법 시술로 인한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캐나다는 낙태를 합법화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우려대로 낙태가 남용되는 현상은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낙태죄 조항은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낙태는 약 5만 건인데 이 중 합법적 사유는 불과 8%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낙태죄 기소도 연평균 9.4건. 2019년 이후 고발된 임신중절은 44건이지만 모두 불기소 처리됐다.

두 번째 생명 보호를 외치려거든 대규모 살상을 방치하는 현실에 답해야 한다. 총기 소지, 핵무기 개발, 수많은 전쟁 행위, 생명을 위협하는 산업 현장과 팬데믹을 초래하는 환경 파괴 등등 반생명적 거대 구조에 대한 전환이 더 절실하다. 전쟁 옹호론자가 낙태 논쟁에서는 갑자기 ‘프로 라이프’가 되어 생명 사랑을 외치는 건 모순이다.

세 번째, 낙태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생명 경시를 우려하는 낙태죄조차 주장이 있지만 여성들의 결정에는 누구보다도 더 절실한 생명 존중 과정이 들어 있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낀 여성 당사자가 내린 결정에는 수없이 많은 고려와 신중한 숙려가 이미 들어 있다. 이런 최선의 결정에 누가, 감히, 단죄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자궁이 없는 자, 말하지 말라!’라는 구호가 나오는 이유다.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는 걸로 족하다.

네 번째 진정 낙태를 줄이려면 포괄적인 성교육, 안전한 피임과 의료 접근권의 보장, 출산·육아 부담의 완화 같은 사회환경 개선을 검토해야 한다. 임신중단은 생명 논쟁이 아니라 성과 재생산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가야 한다.

만약 낙태가 남자들의 일이었다면? 강자의 방식대로, 매우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무언가가 개발됐을 것이다. 음식점의 자동 주문기 키오스크만큼이나 손쉬운 처방전이 만들어졌을 수도... 또는 반대론자들과 한바탕 비피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을 지도…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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