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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입력
2020.10.29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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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중 한 장면.

영화 '미안해요 리키' 중 한 장면.

4인 가족의 가장 A씨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직장을 잃었다.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택배회사에 문을 두드렸다. 업체는 고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것이라 했다. 노동자로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프랜차이즈 사업자가 되는 것이라며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거라고도 했다.

A씨는 사업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아내의 출퇴근에 꼭 필요한 차를 팔아 택배용 차량을 구입했다. 그러나 업무를 시작한 첫날 A씨는 운명의 노예가 됐다. 소변 볼 틈도 없어 페트병을 써야 했다. 자비를 들여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하면 하루 휴가를 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온종일 일에 치이다 보니 가족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졌다. 결국 A씨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강도에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배송 상품까지 도난당했다. 하지만 그는 쉴 수 없었다. A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지옥 같은 일터로 나섰다.

우리나라 여느 택배 노동자의 삶을 대입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것 같은 A씨는 지난해 말 개봉한 영국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이지만 영화의 예리한 시선은 택배 노동자의 비극적 소식을 잇달아 듣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걸 시사한다. 감독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의 ‘프랜차이즈 자영업’이 어떻게 일상을 파괴하고 가족을 무너뜨리는지 보여준다.

세상의 리키는 택배 노동자뿐만이 아니다. 혁신이라는 포장 아래 플랫폼 기업들은 교묘하게 노동 관련 법을 피해 노동자를 사업자로 둔갑시키며 이익을 챙긴다. 4차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플랫폼 노동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공유’ 경제라면서 불이익만 공유하고 이익 공유에는 인색한 기업들이 적지 않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라’며 유혹하는 플랫폼 기업에 노동자는 시간과 노동력을 갖다 바치지만 위험과 책임은 홀로 짊어져야 한다.

리키처럼 플랫폼 기업과 계약한 프랜차이즈 자영업자 또는 프리랜스 노동자는 사업자일까, 노동자일까. 최근 미국에선 엇갈린 판단이 나왔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올 1월부터 AB-5(Assembly Bill 5)법을 시행하며 플랫폼 노동자가 고용된 노동자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범위를 확대했다. 반면 미 노동부는 지난달 대다수 플랫폼 노동자가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가 아닌 독립 계약자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은 분류법을 제안했다.

우왕좌왕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업, 정부, 국회 모두 미봉책만 나열하고 있다. 당일배송이나 새벽배송을 없앤다고, 특수고용직 산재보험 적용 제외 제도를 폐지한다고 택배 노동자의 삶이 눈에 띄게 나아질까.

플랫폼 노동자는 자영업의 단점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단점을 결합한 신개념 노동자다. 그러니 기존 노동자 개념으로 접근하거나 기존 제도를 살짝 손봐선 해결책을 도출할 수 없다. ‘노동자’가 아닌 새 단어를 찾고, 그 분류에 맞는 법을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플랫폼 기업이 주인이 되는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동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위험과 책임을 플랫폼과 정당하게 공유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어야 한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수신자가 부재 중이어서 배송을 완료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택배 기사가 문 앞에 남겨 놓는 메시지인 ‘Sorry, We Missed You’다. 감독의 중의적 화법을 고려하면 꽤 적절한 번역 같다. 노동 현장 곳곳의 리키들을 더 이상 놓치지 않으려면 이들의 노동을 제대로 규정하고 정의하는 작업부터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

[기자사진] 고경석

[기자사진] 고경석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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