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지 하루가 지난 26일. "조문을 삼가달라"는 유가족들의 의사 표명에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입구엔 오전부터 검은 차량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전 고인과 연이 닿았던 정재계 어른들은 물론, 이 회장이 경제 사회에 남긴 족적을 기리기 위해 빈소를 찾는 사람들로 장례식장은 하루 종일 붐볐다. 각계각층 인사들이 몰리면서 오후 한 때 "줄이 길어 조문을 못 드리고 나왔다"는 사람들도 나왔다.
전·현직 '삼성맨' 총출동
이날 오전 9시 홍라희 전 리움 미술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고인 직계가족 입회 하에 진행된 입관식이 끝난 직후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전직 삼성맨은 장충기 전 삼성전자 미래전략실 사장이었다. 장 전 사장은 삼성그룹 비서실과 구조조정본부, 미래전략실 등을 거치면서 이 회장의 최측근 인물로 꼽힌다.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도 조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과 호흡을 맞춰왔던 '올드맨'들도 오전 일찍 빈소에 도착했다. 이날 빈소에 다녀간 황창규 전 KT 회장(전 삼성전자 기술총괄사장)과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의 경우 이 회장이 직접 공들여 삼성에 스카우트한 인재들이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에 천재급 인재는 없어도, 준천재급 인재들은 있다"며 이들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황 전 회장은 조문 후 "어른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다. 저희가 잘 해야 할 것 같다"며 씁쓸해 했다.
이 밖에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과 강인엽 시스템LSI사업부장, 진교영 메모리사업부장, 박학규 DS부문 경영지원실장 등 현직 삼성전자 사장단도 연이어 빈소에 들어섰다. 김기남 부회장은 "애통합니다"라는 짧은 말로 심경을 내비쳤다. 고동진 IM부문장은 오후 2시쯤, 노태문 무선사업부장과 한종희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김현석 CE부문장은 오후 5시 40분쯤 장례식장을 찾았다.
재계 큰 어른 별세에 그룹 총수들 '총 집결'
재계 총수들의 발길도 분주했다. 오전 11시쯤 빈소를 찾아 10분가량 머무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너무 훌륭하신 분이 돌아가셔서 안타깝다"며 "우리나라 정재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1등 정신을 강하게 심어주신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인과의 추억을 묻는 질문에는 "항상 따뜻하게 잘 대해주셨다"고 답했다. 정 회장은 올해 5월 이재용 부회장과 단독 회동 등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과 각별한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오후 1시30분쯤 빈소를 방문했다. 손 회장은 "(이재용 부회장 등 상주들에게) 삼성을 잘 이끌어달라고 부탁드렸다"며 "삼성에서도 근무했기 때문에 (고인과) 잘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인은) 생각이 많이 깊으신 분"이라며 "중요 의사결정을 내릴 때 이런 게 작용해 성공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누나인 손복남 전 CJ 고문이 이 회장 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결혼하면서 삼성가 사돈이 된 손 회장은 1968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에 근무, 삼성전자공업(현 삼성전자) 설립에 기여했다. 1990년대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분리해 나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손 회장이 삼성과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해낸 것으로도 알려졌다.
고인의 여동생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오후 2시30분쯤 비공개로 조문했다. 이명희 회장은 자녀들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 백화점부문 총괄사장을 비롯한 그룹사 사장단과 함께 유족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 등도 이날 오후 빈소를 찾았다.
"고인은 국가 위상 높인 혁신 기업가" 애도 나선 정치인들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호승 경제수석을 통해 추모 메시지를 유족에게 직접 전달한 데 이어, 일반 조문을 받기 시작한 이날 오전부터 빈소엔 정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 오찬 주례회동을 마친 뒤 오후 2시쯤 빈소를 찾았다. 정 총리는 "2세 경영인으로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고, 글로벌 초일류 삼성의 '제2 창업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며 "대한민국 경제계의 위상을 높였고 실질적으로 국가의 부와 일자리를 만드는 데 기여하셨다"며 이 회장을 높이 평가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오전 빈소를 찾아 "고인께서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탁월한 혁신의 리더십으로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웠다"며 "고인께서 해오신 것처럼 삼성이 한국 경제를 더 높게 고양하고 발전시키면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도약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경제 수석을 할 때 (고인을) 자주 만났는데, 1990년대 우리나라 산업 전반을 놓고 봤을 때 삼성전자가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날 빈소를 방문한 수십 명의 정치인 중 가장 눈길을 끈 인물은 '삼성 저격수'로 알려진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박용진 의원과 양향자 의원이었다. 이날 오전만 해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및 상속세 등과 관련해 비판적인 의견을 냈던 박 의원은 "삼성이란 기업에 응원을 드리러 왔다"며 "(유족 분들께) 혹시나 불편하실까봐 올까 말까 고민했다고 말씀드리니 '와 주셔서 너무 고맙고 유족들에게 큰 위로다'라고 하셔서 인사를 나누고 왔다"고 말했다. 고졸 출신으로 삼성전자 상무를 지낸 양 의원은 "(고인이) 배움이 짧은 제게 거지 근성으로 살지 말고 주인으로 살라고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과 박병석 국회의장, 박지원 국정원장, 원희룡 제주지사,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 등도 이날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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