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미국에서는 최근 우리가 겪는 독감백신 사태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겨울을 앞두고 과학자들은 1918년 독감으로부터 비롯된 돼지독감 바이러스가 창궐할 것이라는 목소리를 높였고, 이내 미국인 모두에 백신접종을 해야 끔찍한 유행병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결국 포드 대통령은 2억명을 대상으로 돼지독감 백신 접종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급기야 1억3,500만달러의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했고, 역사상 가장 큰 실패로 기록된 대국민 백신접종 사업이 막을 올렸다.
첫 접종 열흘 후부터 ‘백신접종 사망’ 뉴스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마피아 두목을 백신 주사로 암살했다”는 식의 기사를 쓸 정도였다. 국민들은 접종을 피했고, 백신 접종을 독려하기 위해 포드 대통령은 주치의 앞에서 팔을 걷는 모습을 연출해야 했다. 결국 희대의 전 국민 백신접종 이벤트는 길랭바레 증후군과 백신의 연관성이 드러나면서 4,000건 이상의 소송을 남긴 채 흐지부지됐다. 공교롭게도 돼지독감은 유행하지도 않았다.
1976년 백신사태를 책 ‘독감(Flu)’에서 소개한 뉴욕타임스 과학전문 기자 지나 콜라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사회가 “독감 백신 자체에 대한 일반적 불신”을 갖게 됐다고 평했다. 이후 백신은 종종 현대화 과정에서 울리히 벡이 말했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이면서 오히려 더 큰 위험을 불러오는 ‘위험사회’의 대표적 부속물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1976년 돼지백신 사태는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인 반(反)백신 운동의 씨앗을 뿌린 셈이 됐다. 그리고 2015년 미 캘리포니아 홍역 유행 사태를, 2013년 한국의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집단을 키워낸 양분이 됐음은 물론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칼날과 맞서며 K방역의 높은 평가를 받아온 우리 당국이 많게는 하루 수십명씩 죽음이 드러나는 사태 앞에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19와 독감의 동시유행이 올 겨울 벌어질 경우, 의료시스템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독감백신 무료접종 대상을 크게 늘리고 3,000만명 접종 목표를 내세웠던 정부는 44년전 포드 대통령이 겪은 위기의 전조를 느낄지 모른다.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감염병을 선방했지만, 정작 수십년 동안 겪어온 독감이라는 익숙한 적에게 일격을 당하는 모습이다.
접종 후 사망과 독감의 인과관계, 백신의 안전성을 지레짐작 없이 과학의 렌즈로 확인하는 게 정부가 할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드시 맞아야 할 백신'을 바이러스보다 무섭다고 여길 국민을 정서적으로 안심시키고 접종시스템에 대해 지녔던 신뢰를 회복시키는 게 중요하다. 포드 정부의 백신 위기 당시에도 질병통제센터는 70대 초반 노인이 매일 10만명 당 10명 이상 사망한다는 통계에 의존해 백신 이상 가능성을 축소했으나 흔들린 신뢰는 돌아오기 힘들었다. 만일 당국이 트윈데믹 걱정에 사태를 조기종결하고 의문을 덮는 데 급급하다면 지금의 백신사태는 가까운 미래에 더 큰 병을 불러올지 모른다. 반백신 운동, 그리고 또 다른 안아키의 득세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지금도 누군가는 안아키를 이끌었던 김효진씨의 동영상을 검색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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